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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을 희망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 이광복
  • 승인 2014.04.02 10: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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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 수필│그때 그 시절
20대의 모습. 21c부여신문
충남 부여군 석성면 증산리 원증산 마을. 나는 몽매에도 잊지 못할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무척 빈한했다. 골수에 사무치는 가난. 그 살인적인 빈곤 속에서 어렵게, 아주 어렵게 학창시절을 보냈다.

살아야 했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야 했다. 무엇보다도 굶어죽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당면과제가 항상 두 어깨를 짓눌렀다.

밥벌이가 시급해 몇 번인가 학업을 포기하려 했다. 연로하신 부모님 봉양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하지만 학업 포기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학교 선생님들 때문이었다. 선생님들은 내게 밥벌이 대신 배움의 길을 마련해 주었다. 밥벌이냐, 배움이냐…….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 틈바구니에서 엄청난 갈등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필자는 일찍이 중학교 때부터 문학에 뜻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문학이 어디 쉬운가. 피나는 노력이 필요했다.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학교 도서실을 들락거리며 세계명작 등 숱한 문학서적을 탐독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필자 나이는 우리 나이로 열아홉 살이었다. 하지만 호적 나이는 만 16세에 지나지 않았다. 음력으로 설을 쇠고 나자 스무 살이 되었고, 그로부터 얼마 뒤 호적 나이는 17세로 접어들었다.

자, 나는 이제부터 어디로 갈 것인가. 고교 3학년 때 서라벌예술대학 주최 전국고등학생 문예작품 현상모집에 희곡을 응모해 당선작 없는 가작 1석으로 입상한 적이 있었지만, 그것이 밥을 먹여주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지방공무원 시험을 겨냥했다. 내 실력 정도면 지방공무원 정도는 너끈히 합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호적상 나이가 아직 응시자격에 미치지 못했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호적 나이를 정정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법적으로야 당연히 법원의 판결을 거쳐 호적 나이를 정정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사법서사의 손을 빌려야 하는 등 거기에 따르는 번거로운 절차와 비용 또한 녹록치 않았다.

호적 정정을 포기하고 공무원 시험 대신 여기저기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고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농토가 있었다면 농사꾼이 되었겠지만, 우리 집에는 애당초 송곳 꽂을 땅조차 없었다.

실의와 좌절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 그런 괴로움 속에 급기야 서울행을 결심했다. 서울에 가면 무슨 수가 있겠지. 그 해 6월 충남 논산역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 영등포역에서 내렸다. 낯선 세계, 새로운 세계를 향한 일종의 도전이었다.

하지만 서울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활짝 열린 고생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입을 것, 먹을 것이 없었다. 무더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서러웠다. 한때 신동이니 수재니 천재니 하는 칭송을 들었건만 이 꼴이 뭐란 말인가. 대관절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고생을 해야 하는가. 필자는 수도 없이 하느님을 원망했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도 혹독했다. 배가 고팠다. 이가 시리도록 추웠다. 배고픔과 추위에 떨며 뼈마디가 물러나는 중노동에 시달렸다. 구로동을 거점으로 영등포 일대에 흘린 땀과 눈물은 헤아릴 길이 없었다. 생전 처음 해보는 중노동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 아닐 수 없었다.

고향이 그리웠다. 부모님과 형제들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고향에 갈 수가 없었다. 만약 고향에 땅뙈기라도 있었더라면 이내 돌아갔겠지. 하지만 고향의 우리 집에는 애당초 땅이네 뭐네 그런 것이 없었다. 말하자면 고향에 간다 한들 뭐 뾰족한 수가 있을 리 만무했다. 죽으나 사나 끝까지 맨땅에 박치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처절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일가친척조차 없는 이 황량한 객지에 발을 붙이기란 이만저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학교 다닐 때에는 공부 깨나 했고, 난다 긴다 하는 학우들 사이에서 별로 꿇릴 것 없이 지냈다. 더군다나 세계명작 등 문학서적도 읽을 만큼 읽었다. 그 당시 내 나이에 나만큼 책을 읽은 사람도 흔치는 않았다. 하지만 서울이라는 곳은 네가 뭐냐, 네 놈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매정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촌놈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새파란 애송이 촌놈. 그런 촌놈이 서울 시민으로 신분을 바꾸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특히 별것도 아닌 놈들이 돈 좀 있네 하고 목에 힘을 주고 뻐길 때에는 아니꼽고 더러워서 오장육부가 뒤틀렸다. 때로는 그런 놈들과 맞붙어 목숨 건 주먹다짐도 불사했다.

그 과정에서 죽을 고비를 참 많이도 넘겼다. 사느냐, 죽느냐……. 처음 서울행을 결심했을 때에는 내 나름대로 청운의 꿈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서울에 발을 들여놓은 뒤로는 현실적인 생존 문제와 정면대결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산다는 것이 참으로 절박했다. 그 막다른 골목에서도 한 가닥 희망이 있었다면 그건 바로 문학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다짐했던 문학에의 꿈.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고통도 참아내며 이를 앙다문 채 ‘악으로’ ‘깡으로’ 버텼다.

힘겹게 일한 대가로 푼돈이 생기면 득달같이 청계천으로 달려갔다. 그 당시 청계천에는 서점들이 즐비했다. 내 고향 부여나 논산에서 구할 수 없던 책들이 서점마다 가득가득 빼곡하게 쌓여 있었다. 그런 책을 손에 넣을 때마다 그래도 서울에 오기를 참 잘했다고 자위하면서 문학에의 꿈을 키웠다.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었다. 습작도 했다. 책상이 있을 리 만무했다. 돼지우리보다 별로 나을 것 없는 누추한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책 읽고 원고지 메우며 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던 중 호적 나이 만 18세를 돌파했을 때 어느 잡지사에 취직했다. 직책은 편집부 기자. 그때부터 육체노동에서 벗어나 정신노동을 하게 되었다. 기사 쓰고, 교정 보고, 편집을 배웠다. 하지만 여전히 배가 고팠다. 예나 지금이나 잡지사 임금이 신통치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손에서 책과 원고지를 떼지 않았다. 열심히 읽고, 끊임없이 습작을 계속했다. 그 과정에서 1973년 문화공보부(문화체육관광부의 전신) 문예작품 현상모집에 장막희곡을 응모해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입상했다. 1974년에는 『신동아』 논픽션 현상모집에 당선했다. 그 역경 속에서도 이렇듯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1975년에는 한국문인협회 『월간문학』 편집부 기자가 되었다. 문학지라야 『현대문학』『월간문학』『문학사상』『한국문학』(창간순)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당시 문협 이사장은 문학평론가 조연현 선생님, 상임이사는 시인 이인석 선생님, 사무국장은 희곡작가 오학영 선생님이었다. 필자는 소설가 조정래 선생님, 이세룡 시인과 함께 좋은 문학지를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어느덧 조연현 선생님을 위시하여 이인석 오학영 선생님은 고인이 되셨지만, 그 훌륭한 분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1976년 소설을 써서 『현대문학』 추천을 받았다. 추천위원은 저 유명한 대작가 안수길 선생님이었다. 초회추천작 단편소설 「불길」이 『현대문학』 9월호에 발표되자마자 이 작품을 일본의 『친화(親和)』지가 일역(日譯)하여 전문 게재했다. 그때 내 나이는 우리 나이로 스물여섯, 만으로 스물다섯, 호적 나이로 스물세 살이었다.

필자는 그 여세를 몰아 그 이듬해 1월 대망의 『현대문학』 완료추천을 받았다. 이는 초회추천을 받은 지 4개월만의 일이었다. 이때에도 추천위원은 역시 안수길 선생님이었고, 추천 완료작품은 단편소설 「香煙」이었다. 이때부터 다른 사람들이 필자를 소설가라고 불러주었다.

그 후 마음씨 착한 여성을 만나 결혼도 했고, 1979년에는 『월간독서』 장편소설 현상모집에 당선했다. 당선작은 「牧神의 마을」이었다. 이 작품은 출간되자마자 전국 각지의 서점을 강타했고, KBS 라디오에서 연속방송극으로 각색 방송하는 등 놀라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아이들이 차례차례 태어났다. 스물아홉 살 때에는 작은 아파트도 장만했다. 그때쯤 해서는 서울에 온 지도 어느덧 10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렇듯 필자는 그 힘들었던 20대를 지나면서 절망을 딛고 일어나 희망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 후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저 쓰라렸던 그때 그 시절을 되돌아보며 나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다.

이광복(소설가ㆍ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ㅇ 21c부여신문
ㆍ부여 출생
ㆍ1973년 문화공보부 문예작품 현상모집 장막희곡 입선
ㆍ1974년 『신동아』 논픽션 현상모집 당선
ㆍ1976년 『현대문학』 소설 추천으로 등단
ㆍ19179년 『월간독서』 장편소설 현상모집 당선
ㆍ창작집 『화려한 밀실』『사육제』『겨울여행』『먼 길』『동행』 간행
ㆍ장편소설 『풍랑의 도시』『목신의 마을』『폭설』『술래잡기』『겨울무지개』『바람잡기』『열망』『송주임』『이혼시대(전3권)』『삼국지(전8권)』『한 권으로 읽는 삼국지』『사랑과 운명』『불멸의 혼(계백)』『구름잡기』『안개의 계절』 간행
ㆍ정인호 애국지사 전기 『끝나지 않은 항일투쟁』 간행
ㆍ콩트집 『풍선 속의 여자』『슈퍼맨』 간행
ㆍ전래동화 『에밀레종』 간행
ㆍ항해일지 『태평양을 마당처럼』간행
ㆍ교양서적 『세계는 없다』 『금강경에서 배우는 성공비결 108가지』『천수경에서 배우는 성공비결 108가지』 간행
ㆍ영화대본 『시련과 영광』(국립영상제작소) 『아, 대한민국』(국립영상제작소) 『꼬레야 꼬레야니』(K-TV) 『시베리아 횡단철도』(K-TV) 외 다수
ㆍ동포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조연현문학상, 대통령 표창(2회), 문학저널창작문학상, 한국예총 예술문화상, 노동부장관 표창, PEN문학상 수상
ㆍ현재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한국소설가협회 이사, 나누리장학문화재단 이사, 대한민국 명예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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