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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기획] 원곡 김기승
[탐사기획] 원곡 김기승
  • 21c부여신문
  • 승인 2012.02.02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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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 기행[12]
부여는 역사와 문화, 정신의 고장이다. ‘패망한 나라 백제’의 쓸쓸함에 대하여 말하는 이들이 있으나 백제의 마지막은 비장했다. 멸망 이후의 항전 또한 치열했다. 반면 신라는 어떠했나.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나라를 스스로 고려에 바쳤다. 고려는 이성계의 쿠데타로 뒤집어졌다. 조선은 매국노들의 협력 속에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낙화암은 ‘패배’와 ‘비참함’의 상징이 아니다. 승자들의 역사 속에 그렇게 기록되었을 뿐이다. 낙화암은 차라리 목숨을 던질지언정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자존심’과 ‘항전’의 상징이다. 부여에는 낙화암처럼 잘 알려진 곳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알아야 할’ ‘새로이 의미를 부여할 만한’ 인물과 유적들이 많다.

우리는 성충, 흥수, 계백과 낙화암, 부소산, 궁남지, 정림사지 5층 석탑 등으로 상징되는 사비 백제 시대의 인물과 문화 유적에 대해 친숙한 편이다. 그러나 ‘백제’만이 부여의 전부는 아니다. 고려·조선 시대 그리고 그 이후에도 부여와 관련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은 때로는 서원에, 때로는 묘소에, 때로는 사찰에, 때로는 유적 없이 역사 속에 이름을 남겼다. 이제 이들을 재조명 해 그분들의 뜻과 정신을 되새길 때가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부여 정신’을 찾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격주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들’을 연재하는 이유이다.

대지예찬(1960년대 작품) 21c부여신문

원곡체(原谷體)’라는 글씨체가 있다. ‘찬송가’ 표지글씨체라고 하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이들이라도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충현교회’ ‘새문안교회’ 등의 간판, ‘성경전서’ ‘국어대사전’ 등의 표지글씨도 원곡체이다. 서예체로는 드물게 출판디자인용 한글서예체(산돌체 폰트)로도 수용되었다. 한 마디로 대담하고 끊어질 듯 하면서도 힘 있는 글씨체이다.

그는 역대 서예 고전과 법첩을 통해 한글 및 한문 전·예·해·행·초서의 각체 수련과 혼융 실험을 거쳐 독자적인 원곡체를 완성했다. 한글의 예술 글자화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원곡체를 서예계에서는 추사 김정희 이후 유일하게 독특한 필체라고 평가한다. 이 원곡체의 창시자가 바로 부여 출신 원곡 김기승(1909~2000)이다.

묵영(그림)을 발표해 1960년대 서예계에서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그는 근현대 한국 서예계의 최고 거목이었다. 이동국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는 “원곡 선생은 62세 되던 1971년 원곡체를 완성했다”라고 말한다.
(묵영-서예그림)眞空妙有(좌), 詩情畵意(1978년 작품)(우) 21c부여신문

원곡 선생은 1909년 5월 홍산면 조현리(일명 윗새재)에서 태어났다. 경주 김씨인 김정환 옹의 차남이었다. 집안이 5백석을 추수할 정도로 부자였다. 참봉 벼슬을 지낸 조부 연당(蓮堂) 김동효 옹이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원곡 선생은 네 살 때부터 조부가 세운 한문서당 ‘삼언재(三焉齋)’에서 천자문, 동몽선습, 소학, 통감, 논어, 맹자 등을 배웠다. 망국의 슬픔 속에서 조부는 그에게 신학문을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원곡 선생은 1983년 펴낸 <원곡서문집>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글방에선 훈장의 말을 잘 지켰고 가정에선 어른들 말을 잘 들었다. 그리고 글방에서 글 읽고 외우기와 글씨 공부를 잘하였다.”

소년 시절부터 백일장에 나가면 장원을 했고 힘이 세서 장사로 불렸고, 글씨 공부를 해도 대(大)자를 힘써 익혔다. 당대의 서예가였던 일중 김충현 선생도 언젠가 “나는 항상 원곡의 글씨는 大字가 가장 좋을뿐더러 누구도 따르기 어려우리라 일컫는다”라고 말한 바 있다.

12세 되던 해 원곡 선생은 신학문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하고 홍산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한다. 조부는 머리를 빡빡 깎고 돌아온 손자를 호되게 혼냈으나 결국 보통학교 입학을 허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뒤 월반을 하여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해 4학년을 수료한다.

입학은 공주고등보통학교에 했으나 졸업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했다. 그가 전학을 했던 데에는 사연이 있다. 어려서 3·1운동을 겪은 원곡 선생은 당시 일본인의 만행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아 항상 울분에 차 있었다.

원곡 선생이 어렸을 때 일본인 경찰이 동네 주모를 사살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주민들 사이에 반일 의식이 높아졌고 것이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공주고보에 입학한 그는 2학년 때 학생을 난폭하게 폭행한 일본인 체조 교사를 배척하는 동맹 휴학을 주도한다. 퇴학 처분을 당할 위기에서 그를 잘 봐준 교장선생님의 배려로 휘문고보로 전학한 것이다.

휘문고보 4학년을 수료한 그는 청운의 꿈을 품고 중국으로 가 봉천에 있는 문회고급중학 3학년으로 편입했다. 이 학교는 감리교에서 운영하는 학교였다. 이런 영향으로 원곡 선생은 이때부터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이때 이후 기독교 신앙은 그의 삶을 지탱해 온 중요한 축이 되었다. 새문안교회 평신도로 지냈다. 그는 “붓 끝에 써지는 글씨가 내 혈관에서 나오는 혈서인 양 붉은 꽃송이로 착각을 느낄 때(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는) 예수님을 떠올린다”라고 회고하곤 했다.

문회고급중학을 졸업한 원곡은 상해로 가 중국공학대학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교장으로 중국 당대 최고의 초서 작가인 우우임이 취임해 문화사를 그로부터 배우며 감화를 받았다. 이 시기에 그는 인생의 큰 스승을 만나게 된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이끄는 흥사단에 가입해 도산 선생과 친교를 맺은 것이다.

원곡 선생은 도산 안창호에 대해 “우리가 민족적 위인으로 숭배하는 인물 중에서 사생활이나, 공생활이나 지사의 절의를 완수하는 등 세 가지를 완벽하게 갖춘 분은 도산이 유일하다”라고 말할 정도로 존경심이 깊었다. 매주 토요일이면 흥사단에 나가 도산을 만나고 청년 단원들과 대화를 나누며 독립운동에 힘썼다. 백범 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국독립당에도 입당했다.

대학을 마친 뒤 23세 때인 1932년 고향 홍산으로 돌아온 그는 사업을 모색하다가 작은 아버지가 글씨 공부를 하는 것을 보고 크게 깨친 바 있어 서예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다. 홍산 본가에서 산정 신익선 선생으로부터 서예를 배웠다. 하루 종일 쓰면 그 종이가 마당에 꽉 찰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열심히 글씨 공부를 했는지 짐작이 간다.

26세 때 조선일보 군산지국장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그는 일본 경찰의 요주의 인물 리스트에 올라 있어 감시가 심했다. 자유롭게 사업 등을 벌이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군산물산주식회사를 설립했으나 신통치 않았다.
중국에서 귀국한 직후 홍산 자택에서의 모습(좌). 중국 상해에서 태화약품을 경영할 때 모습(우). 21c부여신문

다시 상해로 건너 간 그는 약종상을 하며 서예 공부를 계속했다. 1939년에 조선서도진흥회 주최전에서 2등상을 받았고 1942년에는 중일문화협회 주최 전중국 서도전에서 입선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서울에 태화약품주식회사를 설립한 그는 사옥 일부를 서화실로 이용했다. 이때는 소전 손재형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원곡 선생은 “신익선 선생에게 1년 간 배운 것이 예과 과정이었단 소전 선생으로부터 배운 것은 본과 과정이었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해방 후 열린 최초의 서도전인 조선서화동연회 주최 전람회에서 2등상을 받고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연속 4회 특선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서예가로서 활동을 펼치게 된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그는 1950년 한국전쟁 때는 가솔을 이끌고 고향 홍산으로 피난했다.

원곡은 1955년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 비문을 썼고 1956년에는 수원 화서문, 남한산성 영일정 현판을 등을 썼다. 이 해에 서예 관련 최초의 개인의숙인 대성서예원을 종로구 적선동에 내 수많은 후학들을 양성했다. 서울대, 숙명여대, 덕성여대 등 각 대학에도 출강했다. 문교부 문화재보존위원, 국전 심사위원, 국전 운영위원 등을 역임했다.

그가 평소 가슴에 새기고 실천했던 경구는 ‘밥 먹을 때도 글씨 사랑, 잠 잘 때도 글씨 사랑’이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평소 ‘밥 먹을 때도 나라 사랑, 잠 잘 때도 나라 사랑’이라고 했던 것을 본받은 것이다.

원곡은 평소 잘 따르는 후배들에게 “죽더라도 거짓말하지 말라”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사적인 감정을 떠나 모든 사람이 동포고 동료이고 이웃이라는 사해동포주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역시 도산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원곡이 심사위원으로 있는 대회에서는 제자들이 상을 타기가 더 어려웠을 정도로 매사에 공정한 태도를 견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 시간 약속을 잘 지키기로 유명했다. 너무 빨리 가면 “시간이 남아도느냐”라고, 너무 늦게 가면 “왜 시간을 안 지키냐”라면서 시간을 엄수할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속마음은 누구보다 따뜻해 제자들에게도 “가정에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꽃이라도 한 송이 꽂는 버릇을 들여라”라고 말하곤 했다. 원곡은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글씨와 추사 김정희의 글씨 등 귀중한 문화재들을 국립현대미술관과 연세대 등에 기증했다.

원곡 선생은 서도와 서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서예하는 사람은 붓을 들고 참된 인간의 본질을 찾는 것이다. 아름답게 얼마 동안 써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도와 예는 자기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실천하는데 있는 것이지 일정한 기한은 없다. 서예는 크게 말하여 지상 인간의 문화를 계승시켜 왔으며 작게는 한 인간을 완성시키는 수양, 수도에 높은 차원의 역할을 해왔다. 서예는 동양만이 가진 독특한 예술이다. 이는 자기의 심정을 그리는 그림이요, 자기 인격의 표현이요, 자기 정신의 발로이다. 붓으로 成字시키는 경지는 글씨를 잘 쓰거나 못 쓰거나 무아, 무심으로 청아한 심리 상태로 돌아가게 한다”

원곡의 10년 후배이자 서예계의 양대 쌍벽으로 불리던 일중 김충현 선생은 원곡 선생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세상 사람들이 원곡을 서예가로만 안다. 그렇다면 이는 원곡을 잘 아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사상가요, 독립운동을 했던 애국자이기도 하다. 또한 해박한 학식을 겸하여 그의 문장에는 심오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가 쓴 <한국서예사>는 내용이나 분량으로 보아 아직 없었던 대저작임에 틀림 없다. 특히 그가 고희를 맞아(1978) 제정한 원곡서예상은 우리 서예계에 처음 있는 盛事로서 원곡의 숭고한 창안을 칭송도 하려니와 후진의 면학 의욕을 북돋는데도 공헌이 크다”

원곡 선생의 수제자인 무림 김영기 국제서법연맹 회장은 “원곡체는 추사체 이후 거의 유일한 우리 글씨체이다. 원곡 선생은 늘 글씨는 인간의 희로애락이 드러나는 예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 인격을 잘 닦아야 한다고 강조하곤 했다. 스승의 뜻을 받들어 나도 독자적인 글씨체를 만들기 위해 40여 년 동안 노력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원곡 김기승은 한국 서단의 거목이었다. 21c부여신문

1909년 부여군 홍산면 조현리 출생
1926년 휘문고보 수료
1927년 중국 봉천 문회고급중학교 졸업
1929년 도산 안창호 선생 지도로 흥사단 입단
1934년 조선일보 군산지국장
1946년 전국 서화전 이등상
1949~1955년 연 4회 특선 문교부장관상 수상
1956년 대성서예원 창설
1958년 제1회 원곡서예개인전 개최
1964년 이준열사 동상문(장충단 공원), 부여 영일루 현액, 포병장교 충혼비문
1966년 계백장군 동상문(부여), <한국서예사> 출간
1970년 퇴계 이황 선생 동상문(남산)
1971년 외솔 최현배 선생 기념탑명(남산)
1973년 도산 안창호 선생 동상명(도산공원)
1978년 제1회 원곡서예상 시상
1984년 은관문화훈장 수훈
1993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받음, 대한민국 기독교 미술상 수상
1995년 서울 정도 600년 기념 ‘자랑스런 서울시민’으로 선정 타임캡슐에 수록됨
2000년 91세로 별세
ㅇㅇ 21c부여신문

필자 / 소종섭
1966년 외산 출신
부여고·고려대 졸업 시사저널 편집장
재경부여군민회 상임부회장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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