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08 12:02 (월)
[기획연재] 꿈꾸다 죽은 늙은이 - 김시습을 찾아서 ①
[기획연재] 꿈꾸다 죽은 늙은이 - 김시습을 찾아서 ①
  • 소종섭
  • 승인 2014.04.30 11: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북한산 중흥사] 김시습, ‘탕유(宕遊-호탕한 유람)’를 떠나다
1493년 매월당 김시습은 부여 무량사에서 59세로 생을 마쳤다. 조선 최고의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인 그의 면모는 사상가, 철학가, 종교인, 문학가, 여행가 등 실로 다양하다. 유교에 바탕을 두었으면서도 불문에 귀의에 <십현담요해> <화엄석제> 등 불교와 관련해 많은 수준 높은 저술을 남겼다. 도교에도 정통한 그는 ‘한국 도교의 鼻祖’로 불린다. 전국을 유람하면서 남긴 시가 남아 있는 것만 2,200수가 넘는다.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와 ‘애민의’‘인군의’ 등 많은 수필도 남겼다. 홍유손은 선생을 기리며 쓴 제문에서 ‘기암괴석과 이름난 물은 공께서 감상하신 뒤에야 비로소 빛나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전국 팔도에 선생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김시습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놀고먹는 이들을 경멸하며 노동의 신성함을 예찬했다. 자리만 누리는 권력자들을 조롱하며 “어떻게 저런 인물이 자리를 맡았나” 하고 한탄했다. 역사 속에서 지조와 광기의 천재로 상징화 된 그는 자유인이며 비판자, 동시에 왕도정치가 구현되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꿨던 이상가였다.

선생은 스스로를 ‘夢死老’ 즉, ‘꿈꾸다 죽은 늙은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착안해 <꿈꾸다 죽은 늙은이- 김시습을 찾아서>라는 기획연재의 제목을 따왔다. 이번 호부터 격주로 연재한다. 과거 속에서 현재를 돌아보는 인문기행이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부탁드린다.


중흥사는 북한산 등안봉 아래에 있다. 김시습은 57세 때 다시 중흥사에 들른다. 남효온 김일손 등과 밤새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백운대와 도봉산에 올랐다. 21c부여신문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분노하며 책을 불사르고 길 위에 서다

어제와 오늘이 조화를 이루니 실로 아름다웠다. 오늘은 어제를 밀어내지 않았고, 어제는 오늘을 뒷받침했다. 어제를 바탕 삼은 오늘은 더욱 풍성했다. 새로 돋는 새잎과 기존의 잎들은 그렇게 하나가 되었다. 대서문(행정구역상 경기도 고양시에 속한다)을 지나 북한산 중흥사로 올라가는 길은 상쾌한 바람과 그 바람이 흔드는 봄의 향연으로 싱그러웠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잎들은 마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듯했다.

북한산 등안봉 아래 자리한 중흥사(重興寺)는 그저 그렇고 그런 사찰이 아니다. 이곳은 매월당 김시습 선생이 과거 공부를 하며 읽던 서책을 불사르고 스스로의 표현대로 ‘탕유(宕遊-호탕한 유람)’를 시작한 곳이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역사 속 김시습의 모습이 여기서부터 그려졌다고 볼 수 있다. ‘김시습의 재탄생’과 중흥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중흥사는 고려 말기의 고승인 원증국사 보우(普愚)가 중수했는데 1713년(숙종 39)에 북한산성을 축성한 뒤부터 대찰로서 면모를 갖추었다. 북한산성 안에 승군이 머물렀던 용암사(龍巖寺)·보국사(輔國寺)·보광사(普光寺)·부왕사(扶旺寺)·원각사(圓覺寺)·국녕사(國寧寺)·상운사(祥雲寺)·서암사(西巖寺)·태고사(太古寺)·진국사(鎭國寺) 등을 관장하는 총본부가 중흥사였다. 승군을 총지휘하는 본부로 승영(僧營)을 설치하고 승대장(僧大將) 1인을 임명하여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겸임하게 했는데 승대장이 중흥사에 머물렀다.

1915년에 홍수로 무너진 뒤 폐허 상태로 있다가 2013년 서울 잠실 불광사 회주인 지홍 스님이 중창했다. 지금은 대웅전 등 전각을 갖추고 사찰로서 제법 면모를 갖추었다. 이름 있는 사찰이었던 만큼 옛 선비들의 문집에는 중흥사에 대한 기록이 여럿 나온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형암 이덕무(1741~1793)는 영조 37년 북한산에 오른 뒤 <북한산 유람기>를 썼다.

여기에 중흥사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용암사를 떠나오던 길을 따라 내려가니 지대가 조금 평평하였다. 거기에 중흥사라는 절이 있는데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이다. 11개의 사찰 중에 가장 오래되었고 앉아 있는 금불상은 높이만도 한 길이 넘었다. 승장(僧將)이 개부(開府-부를 창설하는 것)하여 주둔하고 팔도의 승병을 영솔하였는데 이름은 궤능이라 하고 직책은 총섭이라 하였다. 옆에 마석(磨石)이 있는데 암석에다가 그대로 조각한 것이었다.’ 이덕무 외에도 농은 이엽(1729~1788), 옥오재 송상기(1657~1723) 등도 중흥사와 관련해 기록을 남겼다.

매월당 김시습은 서울 사람이다. 1435년(세종 17) 성균관(지금의 명륜동) 북쪽 반궁리에서 태어났다. 김시습은 신라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6대손인 김주원의 22대손이다. 명주군왕이라고도 불리는 김주원은 강릉김씨의 시조이다.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에 묘소(명주군왕릉)와 위패를 모신 숭의재(崇義齋)가 있다.
김시습의 조부와 부친은 무반직에 있었다. 조부는 오위 부장(오늘날로 치면 연대장 정도의 직위)을 지냈으나 아버지 일성은 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얻는 음보(蔭補)를 통해 충순위(조선시대의 군사조직인 5위 가운데 후위에 속했던 충무위에 딸린 군대)의 하급직에 봉해졌을 뿐이다.

1915년 홍수로 소실되기 전 중흥사 모습. 에 실려 있는 사진이다. 21c부여신문

‘五世 신동’으로 불렸던 김시습

김시습은 어렸을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다. 전설에 따르면 ‘공자가 환생한 인물’이라고까지 여겨졌다. “매월당이 날 때 성균관 사람들이 모두 공자가 반궁리 김일성의 집에서 나는 것을 꿈꾸었다. 이튿날 그 집에 가서 물어보니 매월당이 태어났다고 하였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후세에 김시습을 칭송하다보니 나온 탄생설화로 보인다.

그의 이름 ‘시습’은 논어의 ‘學而時習之 不亦說乎’에서 따온 것이다. 이웃에 살던 학자 최치운이 지어주었다. 최치운은 세종 때 집현전에 들어갔고 다섯 차례나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공조·이조의 참판과 좌승지를 역임했다. 그러나 51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김시습은 여섯 살이었다. 만약 최치운이 더 오래 살면서 관직에 머물렀다면 김시습의 앞날에 힘이 되어 주었을 지 모를 일이다.

김시습은 태어난 지 여덟 달 만에 글을 알았다. 그가 쓴 ‘양양부사 유자한에게 속내를 토로한 서한’에서 스스로 그렇게 썼다. 그의 천재성에 주목한 외할아버지는 김시습에게 우리말보다 ‘천자문’을 먼저 가르쳤다. <당현송현시초(唐賢宋賢詩抄)에서 100여 수를 가려 뽑아 읽게 했다.

김시습은 세 살 때부터 시를 지었다. 유모인 개화가 보리를 맷돌에 갈고 있는 것을 보고 지은 시가 전한다. ‘비도 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지. 누런 구름이 풀풀 사방으로 흩어지네.’

다섯 살 되던 해 김시습은 이웃에 살던 이름 높은 학자인 이계전의 문하에서 <중용> <대학>을 읽었다. 당시 35세이던 이계전은 고려 말 학자인 목은 이색의 손자이자 조선 초 학자인 권근의 외손자였다. 시문에 뛰어났던 조수로부터도 가르침을 받았다. 조수는 김시습에게 ‘열경’이라는 자를 지어주었다. 이들은 김시습이 신동이라고 주변에 말했다.

소문을 들은 정승 허조가 다섯 살짜리 김시습을 찾아왔다. 허조는 김시습을 만나자마자 “늙을 노(老)자로 시구를 지어 보거라”라고 말했다. 김시습은 ‘노목개화심불로(老木開花心不老·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마음은 늙지 않았다)’라고 읊었다. 이후 그는 ‘五世 신동’으로 불렸다.

세종대왕이 승정원 승지를 시켜 김시습을 시험하고 칭찬하면서 비단을 내린 것은 아홉 살 전후한 시기이다. 세종대왕은 다음과 같이 하교했다. ‘내가 친히 인견(引見-불러서 만나는 것)하고 싶지만 관례에 없던 일이어서 사람들이 듣고 놀랄까봐 두렵다. 집으로 돌려보내어 그 아이의 재주를 함부로 드러나게 하지 말고 지극히 정성스레 가르쳐서 키우도록 하라. 성장하여 학문을 성취한 뒤에 크게 쓰고자 하노라.’

13세에 이르기까지 기간에 김시습은 이웃에 살던 대사성 김반으로부터 <논어> <맹자> <시경> <춘추> 등을 배웠고, 겸사성 윤반으로부터는 <주역> <예기> 등을 배웠다. 이 시기에 김시습은 지적 호기심이 왕성해 각종 역사서와 제자백가서 등을 스스로 공부했다.

김시습이 열다섯 살 되던 해인 1449년 어머니가 죽었다. 외할머니는 그를 강릉 부근 시골로 데려가 3년 시묘살이를 시킨다. 하지만 시묘살이가 채 끝나기도 전에 외할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일성은 몸이 약해 집안 일을 꾸려나가기 위해 후처를 맞아들였다. 그러나 계모는 김시습에게 애정을 보이지 않았다. 김시습은 훗날 “부친이 계모를 얻으셔서 세상사가 어그러지고 각박해졌다”라고 <양양부사 유자한에게 속내를 토로한 서한>에 썼다.

모친과 외할머니의 죽음은 그의 마음에 깊은 그늘을 남겼다. 그가 지은 시문에‘아버지’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1450년에는 그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던 세종대왕도 세상을 떠난다. 유년시절 선생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어머니, 외할머니, 세종대왕의 연이은 죽음이 선생에게 어떤 충격을 주었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훗날 그는 <답답함을 풀어보인다>라는 시에서 이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열다섯에 어머니 여의고
외할머니 손에 이끌려 자랐지만
할머니도 곧 땅 속 몸 되시매
생업이 홀연 쓸쓸해졌다.’

그가 불교를 접한 데는 이러한 심적 고통이 한몫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1452년 모친상을 마친 뒤 전남 송광사로 간 그는 설준 대사를 만나 불법을 배운다. 송광사에 잠시 머물다 서울로 돌아온 김시습은 정3품 벼슬인 훈련원 도정이었던 남효례의 딸을 맞아 첫 번째 결혼을 한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부부 생활이 오래 갔던 것 같지는 않다. 언제 헤어졌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부인 남씨에 대한 이야기는 김시습이 남긴 시문 어디에도 없다. 이후 행적을 보아도 그가 부인 남씨와 같이 했던 기간은 1년이 채 안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후사도 없었다.

서울 잠실 불광사 회주인 지홍 스님의 노력으로 최근 중창된 중흥사 대웅전. 21c부여신문

거짓으로 미친 척하며 승려 복색으로 방랑에 나서

이때쯤 정국은 격변하고 있었다. 1452년 5월 18일에 즉위한 단종의 나이는 당시 12세였다. 37세에 왕위에 올랐던 아버지 문종은 어린 세자를 남겨 놓고 병에 시달리다 왕위에 오른 지 2년 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단종이 왕위에 오른 이듬해인 1453년 2월에 과거가 있었다. 김시습은 이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과거에 떨어진 김시습은 책을 싸들고 중흥사로 들어갔다. 과거 공부를 하는 한편으로 <손자> <오자> 같은 병법서를 읽었으며 검술에도 관심을 두었다.

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난이 일어났다. 수양대군이 좌의정 김종서, 영의정 황보인, 이조판서 민신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과 그 아들을 강화도 교동에 안치한 사건이다. 다음 날인 10월 11일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이 되었고, 안평대군은 10월 18일 사약을 받았다. 실권이 수양대군에게 넘어간 2년 뒤인 1455년 6월, 단종은 위협에 못 이겨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중흥사에 머물고 있던 김시습은 서울에서 온 사람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 들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사흘 동안 나가지 않았다. 이후 그는 통곡하며 읽던 책을 불살랐다. 똥통에 빠지기도 했다. 일부러 미친 짓을 한 것이다.

김시습의 친구 송간은 자신의 육촌 동생인 송경원에게 보낸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친구 김열경이 거짓 미친 척한 것에 대해서는 그 광경을 자세히 알지 못하네. 다만 중정(中正)을 중시하는 관점에서 논한다면 어떻다 평해야 할지 알 수 없겠네.’이에 송경원은 이렇게 답했다. ‘친구 김열경의 양광(거짓으로 미친 체 하는 것)을 두고 “깨끗해서 속세의 더러움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지극히 온당한 평이라 하겠습니다.’

자신이 꿈꾸던 왕도 정치를 구현할 수 없는 패도의 세상이 도래했다는 것을 깨달은 김시습은 이후 승려의 복색으로 탕유(宕遊-호탕한 유람)에 나선다. 중흥사를 떠난 그는 철원으로 갔다. 왜 하필 철원이었을까.

ㄴ 21c부여신문

소 종 섭
외산 출생, 부여고-고려대 졸업
전) 시사저널 편집국장
현)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회장
현) 인포마스터 사회적전략센터장
저서 <백제의 혼 부여의 얼> 등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