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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꿈꾸다 죽은 늙은이 - 김시습을 찾아서③
[기획연재] 꿈꾸다 죽은 늙은이 - 김시습을 찾아서③
  • 소종섭
  • 승인 2014.05.28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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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동학사] 김시습, 단종의 제사를 지내고 초혼각을 세우다
1493년 매월당 김시습은 부여 무량사에서 59세로 생을 마쳤다. 조선 최고의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인 그의 면모는 사상가, 철학가, 종교인, 문학가, 여행가 등 실로 다양하다. 유교에 바탕을 두었으면서도 불문에 귀의에 <십현담요해> <화엄석제> 등 불교와 관련해 많은 수준 높은 저술을 남겼다. 도교에도 정통한 그는 ‘한국 도교의 鼻祖’로 불린다. 전국을 유람하면서 남긴 시가 남아 있는 것만 2,200수가 넘는다.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와 ‘애민의’‘인군의’ 등 많은 수필도 남겼다. 홍유손은 선생을 기리며 쓴 제문에서 ‘기암괴석과 이름난 물은 공께서 감상하신 뒤에야 비로소 빛나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전국 팔도에 선생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김시습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놀고먹는 이들을 경멸하며 노동의 신성함을 예찬했다. 자리만 누리는 권력자들을 조롱하며 “어떻게 저런 인물이 자리를 맡았나” 하고 한탄했다. 역사 속에서 지조와 광기의 천재로 상징화 된 그는 자유인이며 비판자, 동시에 왕도정치가 구현되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꿨던 이상가였다.

선생은 스스로를 ‘夢死老’ 즉, ‘꿈꾸다 죽은 늙은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착안해 <꿈꾸다 죽은 늙은이- 김시습을 찾아서>라는 기획연재의 제목을 따왔다. 과거 속에서 현재를 돌아보는 인문기행이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부탁드린다.


동학사 숙모전에 모셔져 있는 충신들의 위패. 21c부여신문

동학사 숙모전 서무에는 사육신이, 김시습은 동무에 모셔져 있어

1457년 10월 24일, 단종은 강원도 영월에서 죽음을 맞았다.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된 것이 그 해 6월 22일이니 유배 4개월 여 만이었다. 나이는 17세였다. 단종의 죽음은 그날 자 조선왕조실록에도 전혀 기록이 없다. 금부도사 왕방연은 차마 사약을 올리지 못하여 시중들던 아이들을 시켜 단종을 목 졸라 죽이게 했다. 그의 시신은 영월 호장(아전의 우두머리) 엄흥도가 수습하기 전까지 아무렇게나 방치된 채로 버려졌다. 금부도사 왕방연이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통한 심정을 담아 읊었다는 시는 한때 교과서에도 실렸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단종이 유배됐던 청령포 맞은편 언덕에는 이 시가 새겨진 왕방연 시비가 있다. 단종이 죽음을 맞게 된 것은 경상도 순흥(지금의 경북 영풍군 순흥면)의 부사 이보흠이 세종대왕의 여섯 번째 아들인 금성대군 이유와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된 일이 직접적인 빌미가 되었다. 금성대군은 사사(賜死)되고 이보흠도 목을 매달아 죽었다.

금성대군은 세종대왕의 여덟 아들 가운데 유일하게 세조에게 저항했던 인물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좌찬성으로 있던 신숙주는 세조에게 단종을 제거하자고 제안했다. 영의정 정인지, 좌의정 정창손, 이조판서 한명회도 이에 동조했다. 단종이 죽은 뒤 영월 호장 엄흥도는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수습하지 않았던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묻은 뒤 아들을 데리고 숨어 살았다. 현재 영월에는 엄흥도 기념관과 실록비, 묘 등이 있다. 역사는 의로운 자의 편이라는 것을 다시 실감케 한다.

동학사는 신라, 고려, 조선의 충신들을 모신 곳이다. 김시습은 이곳에서 사육신과 단종의 제사를 지냈다. 21c부여신문

단종이 청령포에서 죽은 이듬해인 1458년 봄, 세조는 계룡산 동학사에 명하여 초혼각을 세워 단종을 제사 지내도록 하였다. 왜 하필 동학사였을까.

당시 동학사에는 동계사(東鷄祠)와 삼은각(三隱閣)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있다. 동계사는 박혁거세와 박제상을 모신 사당이다. 박제상은 신라 제19대 눌지왕 때에 일본에 인질로 잡혀 간 왕의 아우 미사흔을 구출하고 일본 땅에서 죽은 신라의 충신이다. 936년(고려 태조 19년)에 개국공신 유차달이 왕명을 받들어 사당을 세웠다. 원래 절의 이름은 청량사였는데 이후 동학사로 바뀌었다.

정몽주 이색 길재를 모신 삼은각. 21c부여신문

삼은각은 고려 충신인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등 세분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1394년(태조 3년)에 길재가 정몽주의 위패를 모시고 이 절에 온 것 또한 박제상의 사당이 이곳 동학사에 있었기 때문이다. 1400년(정종 2년)에 공주목사 이정간이 각을 세웠고 1419년 길재가 죽자 위촌 류백순이 야은을 모시면서부터 삼은각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1621년(광해 13년)에 유방택을 추배했으며, 1924년에는 도은 이숭인과 죽헌 라계종을 추배해 오늘에 이른다.

박제상을 모신 동계사. 21c부여신문

한마디로 조선 초의 동학사는 신라와 고려 충신들의 위패를 모신 충절과 절개를 상징하는 사찰이었다. 지금도 봄 가을에 이곳에 모셔져 있는 충신들의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낼 때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이지만 동학사에 숨어 있는 이런 이야기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김시습은 단종이 죽기 전인 1457년 동학사에 간 적이 있다. 이와 관련해 <성삼문유집>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1456년 박팽년, 성삼문 등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죽자, 김시습이 밤중에 사육신의 유체를 노량진에 암매장하고, 계룡산 동학사로 와서 삼은각 옆에다 단을 마련하고 사육신의 혼을 불러 제사를 지냈다. 이듬해 세조가 속리산에서 온양온천에 행차하던 길에 이 절에 들러 삼은각을 둘러보다 초혼각을 발견하고는 계유정난 때 희생된 원혼들의 이름을 적어주었다.”

숙모전 안내문. 21c부여신문

사육신을 위한 초혼각은 삼은각 옆에 지어졌다. 초혼각은 훗날 숙모전(肅慕殿)이 되었다. 사단법인 숙모회가 충남문화재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된 ‘초혼각지(초혼각지)’를 설명하며 만든 자료에는 숙모전에 대해 이렇게 쓰여 있다.

‘세조에 의해 원통하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을 모신 정전(正殿)과 동·서무(東·西廡)에는 계유정난에 원사(冤死)한 황보인 김종서 정분 등 삼상(三相`세 명의 재상)과 안평·금성대군 등 종실 그리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참형을 당한 사육신 그 외 죽음을 당한 수많은 원혼과 생육신 등 충의절사를 모신 곳이다. 1456년(세조 2년)에 김시습이 처음에 이곳에 와서 단(壇)을 모아 사육신을 초혼 제사하고, 1457년에 세조가 속리산을 거쳐 동학사에 들렀다가 초혼단을 보고 감동하여 팔폭비단에 원적(寃籍)이란 제목으로 억울하게 죽어간 명단을 적어 유뷸(儒佛)이 공사(共祀)토록 하고 사패(賜牌)하였다. 단종이 돌아가신 후에 김시습 조상치 등 향사 7인이 엄흥도와 만나 육신단위에 일단(一壇)을 만들어 왕을 초혼 제사하였고 1904년(광무 8년)에 숙모전이라 사액하였다.’

내용 중 ‘단종이 돌아가신 후에 김시습 조상치 등 향사 7인이 엄흥도와 만나’라는 대목이 있다. 하지만 이를 입증해 줄 기록은 없다. 그런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을 뿐이다. 숙모전 서무에는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사육신을 비롯한 48위가, 동무에는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 종실과 김시습 등 생육신을 비롯한 48위가 모셔져 있다. 김시습과 조상치 등은 당시 단종의 의관과 궤장을 가져다가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것은 곧 조정이 단종에 대한 제사를 허락했다는 의미다.

세조가 김시습이 동학사에서 초혼 예식을 올리는 것을 허락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단종의 죽음에 대한 추모 의식이 각지로 퍼져 나가는 것을 막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당시 민간에는 길거리에서 당(幢)을 늘어세우고 승려를 모셔와 죽은 혼을 소리쳐 부르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세조로서는 단종의 죽음을 계기로 단종의 혼을 부르는 의식이 도처에서 일어나는, 즉 저항이 커지는 것을 걱정했을 수 있다.

매월당 김시습의 위패는 숙모전 동무에 모셔져 있다. 21c부여신문

김중수 전 숙모회 회장이 위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1c부여신문

마치 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가 일정한 장소에 합동 분향소를 설치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거리 여기저기에 ‘거리 분향소’를 설치했을 것이다.

어쨌든 1458년 봄, 김시습은 동학사로 갔다. 전 부제학 조상치, 전 참판 이축, 진사 조려, 승려 명선 월잠 운파 등도 모였다. 이들은 과실 등을 갖춰 단종을 제사지냈다. 축문은 조상치가 지었다. 축문의 내용은 이랬다.

해는 성화 3년 정해 3월 14일 신축의 날, 전 행이조참판 조상치는 감히 임금 전하의 영전에 밝게 고합니다. 멀리 영월산을 바라보니 눈물이 흘러 말을 못하겠습니다. 의리를 회계산의 예에서 취하여 이곳에 사당을 세우고, 석철의 일을 본떠서 지팡이와 신을 봉안하는 제사를 받드나이다. 이에 절기를 만나 감히 변변찮은 예물을 올리나이다. 흠향하소서.

2011년 11월 후손들이 숙모전에 모여 제사를 모시고 있다. 21c부여신문

김시습은 제문을 낭독하고서 오열했다. 이때 김시습이 지었다는 ‘제각초혼사(祭閣招魂辭)’라는 글이 전한다. <김시습 평전>을 쓴 고려대 심경호 교수는 이 글이 후대의 사람이 조상치의 글에 근거해 지어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조상치의 축문과 내용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물 맑고 산 깊고 달도 중천에 올랐도다.
오르내리시는 임금님 영혼이 내림하셨네.
큰 은혜를 감명 깊이 생각하여
석철을 모방하여 왕의 의관과 궤장을 가져다 사당에 두나니
회계산에서 우 임금에게 제사한 그 의식을 도입하나이다.

산 과일과 시내 고기 따위로
가을에 곡하고 눈물로 글 지어 초혼하오니
예식은 갖추지 못하였으나 의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부디 흠향하기를 바라나이다.

제사가 끝난 뒤 조상치는 영천으로 떠나며 김시습에게 시를 주었다.

새 울고 꽃 지고 봄이 저무는 때
무한한 충정을 풀잎에나 적어보네.
이별에 임하여 손 마주 잡고 말을 잊었다.
구름 따라 물 따라 동으로 서로 가야 하기에.

김시습도 조상치에게 시를 주었다.

만리 청산에 해 저물 때
반달이 선방의 울타리를 비추네.
옥 골짜기에 송백이 삼삼하게 늘어선 곳
찬 샘을 움켜 마시려다 머뭇거리네.

조상치라는 인물에 대해 조금 더 쓸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는 단종이 폐위된 뒤 경북 영천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묘비를 지어 ‘노산조 부제학 포인 조상치의 묘(魯山朝副題學逋人曺尙治之墓)’라고 썼다. 자신은 세조 조정의 사람이 아니며 임금을 구제하지 못한, 도피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아들에게 자신이 죽거든 이 돌을 무덤 앞에 세우라고 말했다. 충신다운 행동이었다. 김시습은 동학사에서 단종의 제사를 지낸 뒤 조상치 등과 헤어져 관서 지방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ㄴ 21c부여신문

소 종 섭
외산 출생, 부여고-고려대 졸업
전) 시사저널 편집국장
현)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회장
현) 인포마스터 사회적전략센터장
저서 <백제의 혼 부여의 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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