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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꿈꾸다 죽은 늙은이 - 김시습을 찾아서④
[기획연재] 꿈꾸다 죽은 늙은이 - 김시습을 찾아서④
  • 소종섭
  • 승인 2014.06.11 09: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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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西紀行] 김시습, 을 짓다
매월당 김시습 영정(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5호) 21c부여신문
1493년 매월당 김시습은 부여 무량사에서 59세로 생을 마쳤다. 조선 최고의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인 그의 면모는 사상가, 철학가, 종교인, 문학가, 여행가 등 실로 다양하다. 유교에 바탕을 두었으면서도 불문에 귀의에 <십현담요해> <화엄석제> 등 불교와 관련해 많은 수준 높은 저술을 남겼다. 도교에도 정통한 그는 ‘한국 도교의 鼻祖’로 불린다. 전국을 유람하면서 남긴 시가 남아 있는 것만 2,200수가 넘는다.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와 ‘애민의’‘인군의’ 등 많은 수필도 남겼다. 홍유손은 선생을 기리며 쓴 제문에서 ‘기암괴석과 이름난 물은 공께서 감상하신 뒤에야 비로소 빛나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전국 팔도에 선생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김시습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놀고먹는 이들을 경멸하며 노동의 신성함을 예찬했다. 자리만 누리는 권력자들을 조롱하며 “어떻게 저런 인물이 자리를 맡았나” 하고 한탄했다. 역사 속에서 지조와 광기의 천재로 상징화 된 그는 자유인이며 비판자, 동시에 왕도정치가 구현되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꿨던 이상가였다.

선생은 스스로를 ‘夢死老’ 즉, ‘꿈꾸다 죽은 늙은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착안해 <꿈꾸다 죽은 늙은이- 김시습을 찾아서>라는 기획연재의 제목을 따왔다. 과거 속에서 현재를 돌아보는 인문기행이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부탁드린다.


경기도 양주 회암사지에 있는 지공선사승탑. 21c부여신문

고조선과 고구려 유적지 돌아보며 역사를 반추하다

공주 동학사에서 단종의 제사를 지내며 통곡한 김시습이 향한 곳은 관서(關西)지방이었다. <두산백과>에 따르면 관서 또는 서관은 관(關)의 서쪽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관(關)은 강원 회양군(淮陽郡)과 함경 안변군과의 경계에 있는 철령(鐵嶺 : 685m)에 있던 관을 말한다.

따라서 철령의 서쪽을 뜻하는 관서라는 말을 평안남·북도 지역의 지방명으로 사용하는 것은 그리 적절하지 못하다. 그래서 관서라는 말보다는 서북로(西北路)·서북계(西北界)·서로(西路) 또는 서북도(西北道)라는 이칭(異稱)이 더욱 널리 사용되어 왔다.

김시습은 관서로 향하면서 수염을 기르고 승려의 복색을 했다. 그가 언제 처음 불교를 접했는지, 승려로서 언제 계를 받았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승복을 입고 탕유(호탕한 유람)에 나선 것은 분명하다. 관서지방을 돌아본 뒤 지은 시들을 모아 24세 때인 1458년 가을에 엮은 <유관서록> 뒷부분에 쓴 <유관서록후지>에 이렇게 기록했기 때문이다.

‘하루는 갑자기 개탄스러운 일을 당하고는, 남자가 세상에 태어나 도를 행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제 한 몸을 깨끗이 한다면서 인륜을 어지럽힘이 부끄럽지만, 도을 행할 수 없을진댄 홀로 자기 자신만을 착하게 수양함이 옳다고 여겼다. 속세의 바깥을 떠다니면서 북송 때의 도사 진단과 당나라의 도사 손사막의 풍모를 사모하여 그들처럼 도사의 행각으로 살아갈까 하였으나, 우리나라에는 그러한 풍속이 없어 머뭇머뭇하였다. 그러다 어느 날 저녁에 만일 장삼을 걸치고 산인(山人=山僧)이 된다면 소원을 풀 수 있으리라고 문든 깨달았다.’

고려궁궐터인 만월대는 김시습이 들렀을 당시 풀이 무성한 상태였다.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 장소였다. 21c부여신문

장삼을 걸치고 산인(山人=山僧)이 된다면 소원을 풀 수 있으리라

김시습은 패도의 세상에 대한 울분과 허전함을 고조선과 고구려의 자취가 살아 있는 관서기행을 통해 달래며 민족의 정신과 뿌리에 대한 탐구를 추구했다. 탕유(宕遊·호탕한 유람)는 그에게 정신적인 힐링이자 국토 기행이었고, 민중들의 삶의 현장을 체험하며 애민 사상을 정립하는 산 교육장이었다.

1년 동안 이루어진 김시습의 관서기행은 임진강-개성-송악산 등 명승지-절령-평양-영유-안주-묘향산-희천-어천-안주-평양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김시습은 개성의 옛 고려궁궐에 들풀만이 무성함을 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팔각 궁궐 속에 잔디 풀만 깊었는데
생황의 노래 적막하니 찬 기운이 침침하네.
좋은 꽃은 말도 없이 피었다가 지기만 하는데
예쁜 풀은 절로 향기 품어 옛날과 지금 이루었네.

개성의 동대문 근처에 세운 목청전은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집이다. 그곳에는 태조 이성계의 영정이 모셔져 있었다. 김시습은 ‘요컨대 알겠네. 억만 년 조선 운수가, 틀림없이 선왕의 웅대한 창업에서 비롯되었음을’이라고 읊었다. 김시습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의로운 일이라고 평가했다.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왕조를 건국하는 일에 나선 이성계를 요순 임금에 비유하며 칭송했다.

예와 악을 개혁하니 요임금의 천하 크고
나라를 태평케 하니 순임금 나날이 이어지는 것 같구나.
청묘(주나라 문왕의 종묘)의 향 연기는 상서로운 기운과 섞이고
동정의 나무 빛은 상서 바람에 떨치네.
억만 년의 조선 운수 알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임금 창업이 큼에서 시작되네.

김시습은 관서기행에서 한 역사상 인물을 만난다. 인도에서 온 승려 지공(1300~1361) 선사이다. 인도 마가다국의 왕자였던 그의 법명은 선현(禪賢). 지공은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불법을 전했다. 1326년 3월 원나라 황제의 배려로 금강산에 향을 사르기 위해 개성 감로사에 와서 금강산을 다녀온 뒤 개성 동쪽 숭수사에 주석했다.

회암사를 비롯한 우리나라 각 지역에 불법을 전파했다. 그가 고려를 방문했을 때 수계를 받으려는 백성들이 하루에 수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회암사를 중창하려던 지공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황제의 명에 따라 원나라로 돌아갔다. 1363년 원나라에서 입적했는데 유골 중 일부가 1370년 원나라로 옮겨졌고 1372년 9월 10일 왕명에 따라 회암사 부도탑에 안치되었다. 그는 인도, 중국, 고려에서 이름을 떨쳤던 당대 최고의 고승이었다.

김시습은 관서기행에서 지공선사(왼쪽)와 나옹 혜근선사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는다. 김시습은 이후 이들이 머문 곳을 찾아가고 시문을 여럿 남겼다. 21c부여신문

지공선사, 나옹화상으로부터 깊은 인상 받아

김시습은 이후 관동기행, 호남기행, 영남기행에서도 지속적으로 지공선사의 자취를 좇는다. 지공선사의 법맥은 나옹 혜근선사-무학대사로 이어진다. 이와 관련해 김시습은 묘향산 보현사도 찾았다. 보현사는 고려 정종 때 창건한 사찰인데 고려 공민왕 때 나옹 혜근(1320~1376)선사가 중창했다.

나옹은 원나라에서 지공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뒤 간화선을 제창했다. 간화선은 화두를 근거로 깨달음을 구하는 참선법이다. 김시습은 나옹의 인품에 크게 감명을 받았던지 훗날 그를 찬미한 시를 여러 편 남겼다.

김시습은 또한 관서기행을 통해 두 가지 시야를 갖춘다. 하나는 신화 및 민속에 대한 관심이고 다른 하나는 어부나 상인의 아내와 같은 기층민의 애환에 대한 인식이다. 별포에서 만난 한 어부의 이야기가 전한다.

이 어부는 김시습에게 “지난해 관가에서 어세(漁稅)를 토색(討索)하기에 가족을 이끌고 외딴 섬으로 들어갔으나, 금년에 또 마을 아전이 와서 세금을 재촉하므로 집 팔아 배를 사서 물풀 사이에 떠돌고 있습니다”라고 하소연하며 늙은 아내가 가져온 한 잔 술에 취해 배따라기 노래를 부르며 떠나갔다.

대동강가에서 상인 아내의 넋두리도 들은 김시습은 이런 과정을 거치며 백성의 아픔과 고통을 현장에서 느끼게 된다. 그것은 지금껏 자신이 살아온 삶의 세계와는 또 다른 세계였다. 김시습은 조선시대에 서경덕, 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로 유명한 박연폭포에도 들러 시를 남겼다.

푸른 벼랑 길이가 일만이니 얼마나 웅장한가
위에 넓은 못 있으니 깊이가 1천척이라.
서린 용이 잠을 깨자 노함을 금치 못해
맑은 구슬 뿜어냄이 천만 섬이 되는구나.

김홍도가 그린 부벽루 연회도. 부벽루는 ‘취유부벽정기’의 무대가 된 곳이다. 21c부여신문

개성을 떠난 김시습은 절령을 넘어 경천역을 거쳐 평양으로 가 훗날 <금오신화> ‘취유부벽정기’의 무대인 부벽루를 보았다. ‘취유부벽정기’는 대동강의 부벽정에서 홍생과 기자의 딸이 시를 주고받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벽루는 원래 영명사에 속한 누각으로 만들어졌는데 12세기에 ‘대동강의 맑고 푸른 물 위에 떠 있는 정자’라는 뜻에서 부벽루(浮碧樓)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돌아가는 돌다리는 천길이요, 누각은 백척이라.
붉은 마루에 푸른 기와가 강가에 비치네.
풍광은 늙지 않았으나 나이는 늙으려 하고
구름은 무심하나 사람은 유심하기만 하구나.

평양에서는 초나라 사람 굴원이 쓴 <초사>의 구가에 비유하여 고조선의 단군, 기자, 후토, 분연 등의 역사를 차례로 읊었다. 김시습은 아사달에 내려와 나라를 열었던 단군과 주나라에 굽히지 않고 조선에 들어와 백성을 깨우친 기자를 칭송한다. 그리고 농경에 필요한 물과 땅을 관장하는 후토와 분연에게도 제사를 지낸다. 이렇게 김시습은 고조선의 창업자와 농업신에 대한 제사 의식을 노래로 읊으며 민족의 뿌리와 역사를 찾는다.

김시습은 송도삼절로 유명한 박연폭포에도 들러 시를 남겼다. 21c부여신문

묘향산 보현사는 나옹 혜근선사가 중창한 곳이다. 21c부여신문

유교, 불교 등의 구별보다는 사상의 체화가 더 중요하다

관서기행 중에 김시습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김수온 일행을 만났다. 김수온은 당대의 유명 승려였던 신미 대사의 동생이었다. 김수온은 김시습과 10년 전부터 안면이 있었다. 김수온은 불교를 좋아한 세종과 세조 때 불경의 국역 간행 사업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김수온은 승려의 복색을 하고 자신을 찾아온 김시습이 못마땅했다. “유학을 버리고 이단에 빠진 것은 무슨 마음인가?”라고 물었다. 김시습은 “길이 비록 다르지만 마음을 기른다는 점에서는 똑같다”라고 답했다.

김수온은 유학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현실 정치에 참여한 인물이다. 반면 김시습은 현실 정치를 벗어나 불교와 도가적 관점에서 국토를 기행하며 새 삶을 모색했다. 김시습은 현실과 방외라는 방법론상의 차이는 있지만 깨달음의 본질은 하나라고 보았다. 불교와 유교의 근본 가르침은 같고 일상의 삶에서 어떻게 실천하면서 마음을 닦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즉, 불교냐 유교냐 하는 구별보다는 근본적인 참된 사상을 체화해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것은 불교, 개신교, 천주교 등으로 나누어 갈등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사상의 회통이라고 할 수 있겠다.

1458년 김시습은 평양 근처의 초막에 머물면서 봄부터 가을까지 관서지방을 탕유하며 지었던 시들을 모아 <유관서록>이라고 하고 후지(後志)를 엮었다. 그는 관서지방을 탕유 한 소감을 이렇게 적었다.

‘어떤 때는 시냇가의 바위에 의지하고 어떤 때는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하늘에 치솟은 소나무와 참나무, 낭자하게 깔린 채소와 버섯, 기이한 새와 짐승, 흐드러지게 자라난 풀과 나무를 보았다. 그것들 모두가 내게 기꺼이 시를 읊조리게 하기에 나뭇잎에 쓰고 바위 벼랑에 써놓았다. 오두막집으로 돌아와 편안한 마음으로 묵상에 젖어 차를 달이고 나물을 먹으니, 분잡한 생각들을 떨쳐 버리고 세간에 연연하는 마음을 잊을 수 있었다.’

김시습은 관서기행에서 유학, 불교, 도교 등과 관련된 책을 읽었다. 또한 주나라부터 송나라까지의 한시와 시문을 모아 엮은 <고문진보>를 읽었다. 이 책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필독서였다.

세상의 주옥들이 부질없이 다투지만
다 쓰면 마침내 한 개도 남음이 없네.
이 보배를 만약 공동에 간직할 수 있다면
속에 찬 모두가 옥과 같은 소리를 내리라.

평양에서 만난 늙은이 이군은 김시습에게 <도덕경>을 주었다. 김시습은 <도덕경>을 몸에 지니고 생명을 연장하는 방법을 배워 신선의 세계에서 노닐고 싶은 꿈을 꾸기도 한다.

훗날 김시습의 일생에 도가의 방중술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등장하는 것이나 그가 수락산에 머물 때 도가의 경서로 양생(養生)과 수련(修練)의 원리를 담고 있어 선도(仙道) 수련의 주요 경전으로 여겨지는 <황정경> 등을 읽는 바탕이 관서기행 시절 싹튼 것으로 보인다. 유·불·도를 넘나드는 학문적 회통의 추구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관서기행 시절 김시습은 <주심경>도 얻었다. 중국 남송시대 주자의 학문을 계승한 진덕수가 편찬한 <주심경>은 유교 경전과 도학자들의 글에서 심성 수양과 관련한 글 37장을 뽑아 편찬한 것이다. 이 책은 불교에도 집착하지 않고 도교, 유교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관서기행을 마친 김시습은 금강산을 향해 관동기행을 떠난다. 1년에 걸쳐 이루어진 관서기행과 달리 관동기행은 2년 동안 이루어진다.

[참고]
<김시습 평전> 심경호
<김시습과 떠나는 조선시대 국토기행> 김재웅
<매월당 김시습> 이문구
<매월당 김시습> 이종호


ㄴ 21c부여신문

소 종 섭
외산 출생, 부여고-고려대 졸업
전) 시사저널 편집국장
현)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회장
현) 인포마스터 사회적전략센터장
저서 <백제의 혼 부여의 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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