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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출범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출범
  • 21c부여신문
  • 승인 2012.02.10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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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외산 무량사에서 창립총회 갖고 본격적인 사업추진
초대회장 소종섭 시사저널 편집장 선출, 창립회원 무량사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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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지식인이자 문학·사상가였던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생을 마감했던 외산 무량사에서 그를 가장 그리워하는 젊은이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창립총회가 지난 2일 부여군 외산면 무량사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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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칭)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준비위원회(준비위원장 소종섭 시사저널 편집장, 45, 사진)가 주최한 이날 총회에는 유홍준(前 문화재청장) 명지대교수, 김무환 국립중앙청소년수련원장, 김진환 재경부여군민회장, 박정현 안희정충청남도지사 정책특보, 윤준웅 부여문화원장, 임화빈 부여군의원, 박기련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종책특보, 무량사 석전 주지스님, 유영빈 부여군다문화가족협의회장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회원 70여 명이 참석했다.

지난해 5월 16일 소종섭 시사저널 편집장 등은 수락산 매월정과 폭천정사터, 중계동 매월당 동상 등을 답사하고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창립과 관련해 의견을 교환하며 창립 작업을 진행하기로 결의하고, 이만용 수암생명공학연구원 이사장, 송월주 前 조계종 총무원장, 유홍준 명지대교수 등이 뜻을 함께하여 준비위를 구성하고 창립총회를 갖게 됐다.

특히, 준비위원장을 맡아 초대회장에 선출된 소종섭 시사저널 편집장은 매월당 김시습과는 각별한 인연으로 이날 더 큰 주목을 받았다. 소 편집장의 고향이 외산면 무량사 극락전 뒷편이어서 태어나면서부터 유년시절까지 김시습 영정을 바라보며 자랐고, 또 무량사와 김시습의 부도 등이 소 편집장의 친구가 되어 그의 가슴에는 늘 김시습이 자리잡고 있었기에 그가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를 추진하는데도 어쩌면 가장 어울리면서 책임감 있는 인물이 아니냐?는 반응들이 참석자들로부터 나타났다.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초대회장으로 선출된 소종섭 회장이 직접 작성한 ‘발기취지문’의 내용을 보면 간결하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왜 ‘김시습 기념사업회’를 추진해야 하는지 소 회장의 의지와 신념 및 취지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여기에 유홍준 명지대교수의 ‘무량사와 김시습’이란 주제로 창립회원들과 함께한 답사에서 지금껏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었던 또 하나의 ‘김시습 역사’가 시작됨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유홍준 교수는 문화재청장시절 틈나는대로 무량사를 찾아 사색을 즐겼으며, 그 누구보다 ‘부여’를 사랑하는 한 사람이 되어 지금은 5도2촌 생활을 하면서 수년 전에 외산면 반교리에 휴휴당(休休堂)이라는 집을 짓고 집필활동을 하는 반교리 청년이 되어 자연인으로서 부여 홍보대사가 되었다. 이날 유 교수는 회원들과 한걸음 한걸음 걸으며 ‘김시습’에 대한 답사를 보여줘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선사했다.

한편, 소종섭 초대회장을 선출하고, 감사에는 류현길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와 한남수 대전일보 부여주재기자를 선출했다.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창립총회 모습. 21c부여신문

잊을 수 없는 감동으로 진행된 ‘유홍준 교수와 함께한 무량사와 김시습’ 답사. 21c부여신문

정한모 시인, 김동수 선생의 글씨가 담긴 김시습 시비. 21c부여신문

김시습의 ‘부도’ 앞에서... 21c부여신문

발기취지문
우리는 오늘 매월당이 생을 마친 이곳 부여 무량사에 모여 매월당 김시습을 생각합니다. 5백18년 전 인물, 그러나 박제화 되지 않고 아직도 우리 현실 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역사 속 위인. 누구는 그를 일러 ‘조선의 천재’라고 했습니다. 누구는 그를 일러 ‘시대의 자유인’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는 그를 일러 ‘역사의 반항아’라고 했습니다. 또 누구는 그를 일러 ‘유·불·도에 통달한 진정한 종교인’이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그는 누구입니까?

그는 바람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하늘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끝 모를 데 없는 하늘처럼 그는 천하를 주유했고 걸림이 없었습니다. 권력에 갇히지 않았고 백성의 아픔에 공감했지만 도그마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승복을 입고 불교에 취했지만 누구보다 당시 불교의 행태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현장으로 들어가 가난한 이들, 소외받는 이들의 아픔에 귀 기울였습니다. 권력만을 탐하는 이들에 대한 해학적인 조롱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조와 의리를 지켰습니다. 그는 기록가이자 혁신가이기도 했습니다. ‘관서록’ ‘관동록’,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 등이 상징적입니다. 그는 당대의 새로운 문화 변혁을 주도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소통의 부재, 도그마에 갇혀 서로 제 잘났다고 자랑이 한창입니다. 다른 생각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제 생각만을 남에게 강요합니다. 인본에 바탕을 두지 않는 권력과 금력을 탐하는 세태의 흐름이 극에 달해 있습니다. 물질 만능주의가 종교의 영역까지 스며들어 돈이 최고인 세상이 되었습니다. 매월당은 사람 중심, 애민(愛民) 사상을 주창했습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어진 정치’야 말로 그의 애민 사상의 핵심입니다.

매월당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책을 불사르고 이에 저항했던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해 역사 속에서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 시대의 ‘정의’와 통합니다. 도덕과 진리가 금력과 권력의 그늘에 가려있는 지금, 매월당은 우리가 되살려 널리 알려야 할 시대의 표상입니다. 그의 소통, 융합 사상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되살려야 할 시대 정신입니다. 우리가 지금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를 출범시켜 그를 선양하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매월당 김시습을 다시 생각합니다. 그의 사상과 삶이 보여준 가르침을 깊이 새깁니다. 지금의 현실 속에서 그의 정신을 계승·발전시켜야겠다는 결의를 다지며,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를 출범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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