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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꿈꾸다 죽은 늙은이 - 김시습을 찾아서 ⑤
[기획연재] 꿈꾸다 죽은 늙은이 - 김시습을 찾아서 ⑤
  • 소종섭
  • 승인 2014.07.02 10: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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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절경에 경탄하며 영욕(榮慾)을 잊다
1493년 매월당 김시습은 부여 무량사에서 59세로 생을 마쳤다. 조선 최고의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인 그의 면모는 사상가, 철학가, 종교인, 문학가, 여행가 등 실로 다양하다. 유교에 바탕을 두었으면서도 불문에 귀의에 <십현담요해> <화엄석제> 등 불교와 관련해 많은 수준 높은 저술을 남겼다. 도교에도 정통한 그는 ‘한국 도교의 鼻祖’로 불린다. 전국을 유람하면서 남긴 시가 남아 있는 것만 2,200수가 넘는다.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와 ‘애민의’‘인군의’ 등 많은 수필도 남겼다. 홍유손은 선생을 기리며 쓴 제문에서 ‘기암괴석과 이름난 물은 공께서 감상하신 뒤에야 비로소 빛나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전국 팔도에 선생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김시습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놀고먹는 이들을 경멸하며 노동의 신성함을 예찬했다. 자리만 누리는 권력자들을 조롱하며 “어떻게 저런 인물이 자리를 맡았나” 하고 한탄했다. 역사 속에서 지조와 광기의 천재로 상징화 된 그는 자유인이며 비판자, 동시에 왕도정치가 구현되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꿨던 이상가였다. 선생은 스스로를 ‘夢死老’ 즉, ‘꿈꾸다 죽은 늙은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착안해 <꿈꾸다 죽은 늙은이- 김시습을 찾아서>라는 기획연재의 제목을 따왔다. 과거 속에서 현재를 돌아보는 인문기행이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부탁드린다.


김시습은 천하절경인 금강산(위)을 돌아보며 분노를 달래고 슬픔을 삭인다. 그림은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아래) 21c부여신문

장안사, 보덕암, 마하연 등 둘러보며 도리 사라진 세상 비판

1459년(세조 6년), 김시습의 나이 25세 봄날에 그는 관동으로 갔다. 관서지역을 돌아보며 못 다 이룬 꿈에 대한 회한과 세조의 왕위찬탈에 대한 울분을 달랜 김시습은 역사와 문화유산의 가치에 새로이 눈 떴다. 김시습이 관동기행에 나설 때는 세조가 정권을 잡은 지 6년이 지나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 때였다. 금방이라도 세상이 뒤집힐 것처럼 울분을 토해 내던 이들은 누구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누구는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정권에 빌붙어 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끊임없는 물음은 김시습을 괴롭혔다.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세상의 덧없음을 한탄하고 흐르는 물을 보며 언제 세상에 나아가 꿈을 펼칠 것인가 자문자답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혈기왕성한 청년 김시습은 고뇌와 번민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그는 금수강산의 아름다운 자연과 선조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예찬하면서 땅과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고려 왕실의 원찰이었던 개성 송림사에서 동안거를 한 김시습은 임진강을 건너 파주로 들어갔다. 알고 지내던 노승이 분포(지금의 서울 반포)에 새로 불당을 지었으니 들렀다 가라는 전갈을 보내와 잠시 한성에 들른다. 그런 다음 경기도 포천 민가에서 하룻밤을 묵고 영평현을 거쳐 김화의 누각에서 휴식을 취한 뒤 단발령을 넘어 금강산으로 간다.

단발령은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간선도로가 지나는 산봉우리이다. 신라의 마의태자가 망국의 설움을 안고 출가를 결심한 태자가 이곳에 올라보고 머리를 깎기로 결심했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금강산으로 가는 길은 포천·영평을 거쳐 김화를 지나 내금강으로 가는 길과 유점사를 거점으로 하는 외금강 행로가 있었다. 흔히 백두대간의 분수령 서쪽 회양군에 있는 지역을 내금강, 분수령 동쪽 고성군에 있는 지역을 외금강, 고성군 바다를 해금강이라고 부른다. 김시습은 내금강으로 갔다.

보덕암은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듯한 모습이 아찔함을 느끼게 하는 암자이다. 21c부여신문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제일 가고 싶어 했던 곳, 금강산

금강산은 계절에 따라 불리는 이름이 있을 만큼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봄에는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으로 불린다. 김시습이 금강산을 찾은 이유는 단순히 경치가 뛰어나서가 아니다. 금강산은 불교의 영지(靈地), 즉 신령스런 땅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강산의 사찰이 108곳에 이른다고 나와 있다.

조선시대에 선비들이 제일 가보고 싶어 했던 곳이 바로 금강산이었다. <죽부인전>을 쓴 이곡은 <동유기>에서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예찬했다. 우암 송시열은 <금강산>에서 현실의 욕망과 집착을 걷어내는 장쾌함을 노래했다. 선조 때 송강 정철은 <관동별곡>에서 금강산의 절경을 우리말 가사로 읊었다. 겸재 정선은 금강산을 화폭에 담아냈고 춘원 이광수는 <금강산유기>에서 “천지창조를 목격했다”라며 금강산의 절경을 극찬했다.

<북학의> 저자인 박제가는 ‘금강산’이라는 장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 첫머리에 “지팡이 짚고 하루에 하나씩 오른다 해도, 백 년에 삼 분의 일은 다녀야 일주할 수 있지”라고 했다. 또 “그림으로 그리려 해도 빠뜨리게 되니, 천억으로 흩어두어 마음껏 찾아볼 일”이라고 했다. 금강산의 천변만화 한 세계를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지금은 중단되었지만 금강산 관광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도 우리 민족에게 ‘금강산’은 남다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남북 관계가 빨리 좋아져 다시 금강산 관광이 이루어지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김시습의 내금강행은 장경봉 아래에 있는 장안사에서부터 시작됐다.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어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장안사는 조선 중기의 화가 겸재 정선과 이정의 그림 <금강산 일만 이천봉>에 그려져 있어 옛 모습을 짐작케 한다. 김시습은 늘 그랬듯이 발길 닿는 곳마다 시를 남겼다. 장안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소나무와 전나무 그늘 속 옛 도량에 와
조용히 선방 문을 두드리네.
노승은 선정에 들고 흰 구름만 노니는데
학이 옮겨서 깃드니 맑은 기운이 이어지누나.
새벽에 해 떠오를 때 금빛 전각 빛나고
차 김이 날리는 곳에 서린 용이 날개치네.
청한한 경계를 두루 떠돌면서
영욕을 마침내 잊어버렸네.

금강산 4대 사찰 가운데 표훈사(위)만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표훈사와 표훈사의 정문인 능파루.(아래) 21c부여신문

이어 만폭동 입구에 있는 표훈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에는 나옹 혜근의 사리를 모셔 놓은 탑이 있어 김시습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는 곳이다. 금강산 4대 사찰은 유점사, 장안사, 신계사, 표훈사인데 이 가운데 옛 정취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은 표훈사가 유일하다. 표훈사는 670년 신라의 승려 능인·신림·표훈이 처음 세우고 신림사라고 했다가 3년 후 이름을 고쳤다. 표훈사 중심건물인 반야전 불단에는 법기보살의 장륙상을 봉안하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정면이 아니라 동쪽 법기봉을 향해 있다.

김시습은 정양사, 진헐대, 백천동에 이어 만폭동을 찾는다. 정양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내금강 표훈사 북쪽 방광대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산의 정맥이 양지바른 곳에 놓였다고 해서 정양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온다. 고려 태조 왕건과 법기보살의 전설이 있는 방광대와 태조가 절을 했다는 배점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31본산 가운데 하나였던 유점사의 말사였다. 한국전쟁 때 헐성루, 영산전, 명부전, 승방 등이 소실됐다. 만폭동 폭포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보며 근심과 걱정이 한순간에 날아가는 시원함을 느꼈다.

일만 폭포 공중을 날아 옥 같은 물꽃을 뿌리고
좌우 언덕 담쟁이는 올라가며 서로 끌어주네.
밝은 구슬 만 섬이라 하늘은 아낌이 없어
구름 비단 병풍 사이에다 흩어 놓는구나.
유쾌하게 웃으며 한 쌍의 물 벼랑을 바라보니
십 년간의 홍진 자취 단번에 사라지네.

김시습은 이밖에 원통암, 진불암, 보덕암, 망고대, 원적암, 국망봉, 개심폭, 송라암, 만회암 등 금강산의 명소를 두루 돌아본다. 보덕암은 표훈사에 딸린 암자인데 내금강의 유명한 만폭8담 중 하나인 분설담의 오른쪽 20m 벼랑에 매달리듯 서 있다. 보덕암이란 이름은 옛날 이곳에서 마음씨 착한 보덕각시가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고해서 붙여졌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본전인데 벼랑 위 평지에 요사채도 있었다. 보덕암을 지탱하고 있는 구리기둥은 1511년(중종 6년)에 설치한 것으로 나무 기둥에 19마디의 동판을 감은 것이다.

금강산 마하연은 해발 846m의 높은 대 위에 있다. 마하연은 본래 신라 문무왕 원년에 의상 대사가 창건했고, 신라의 마의태자가 생을 마치려 했던 곳이며, 고려 나옹 화상이 수도한 곳이기도 하다. 김시습은 마하연을 두고 “몇백 겁을 두고 소원을 세운 것은 평생에 한 번 이 산 앞에 와보는 일”이라며 마하연과 금강산의 경치에서 느낀 경탄을 노래했다. 그러나 숙명과도 같은 슬픔과 울분은 여전히 그의 가슴에 살아 있었다. 여전히 그의 마음 한켠에 남아 있는 쓸쓸함과 슬픔을 완전히 걷어낼 수는 없었다. 그것은 마치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마음 속에서 아픔의 눈물이 흐르는 것을 주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잊으려 할수록 잊히지 않는 그런 것이랄까.

김시습은 장안사에서 금강산 기행을 시작한다. 장안사터(위)와 한국전쟁으로 소실되기 전인 일제시기 장안사(아래)의 모습. 21c부여신문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도 쓸쓸함과 슬픔을 지우지 못해

김시습의 내금강 답사는 입구에서부터 점차 높은 봉우리로 가는 형태로 진행됐다. 아마도 금강산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김시습은 그 절경에 감탄하면서 한동안 세상의 근심과 아픔을 잊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젊은 김시습에게 금강산의 절경은 무색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기보다는 울분과 분노를 삭히는, 왕도정치가 구현된 세상을 꿈꾸는 이상향으로서 다가왔을지 모른다. 김시습은 금강산에서 산새들이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며 새들의 지저귐을 시로 풀었다. ‘위수추리(누구를 위해 명리를 쫓아 내달려가느냐?)’ ‘역막파공(역시 공을 파악하지 못하고는)’ ‘불여귀(돌아가만 못하리)’ ‘비비(슬프고 슬프다)’ 가 그것이다. 두견이 울음소리를 노래한 시 ‘불여귀(돌아감만 못하다)’에서 그는 방랑의 애달픔을 이렇게 토로했다.

돌아감만 같이 못하다만
어느 곳이 돌아가 쉴 곳인가?
벼슬길엔 바람과 파도가 사납고
벼슬아치 집엔 아는 이 드물어.
늘 근심 걱정하면서
제 몸과 그림자가 서로 불쌍히 여길 뿐.
임천에서 내 분수 달게 여겨
함정에 빠지지 않음이 더 나으리.

‘위수추리(누구를 위해 명리를 쫓아 내달려가느냐?)’에서는 유학자들이 부당한 권세를 포기하고 올바른 행동을 보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했다.

누구를 위하여 명리로 달려가느라
도성의 큰 길 한가운데서 바쁜 것인가.
세상의 어지러운 일은 사람을 유인하는데
영욕 때문에 하늘을 원망하누나.
눈에 가득한 것은 슬픈 일 뿐이고
갈림길에서 갈 길이 막혀 울지 않을 수 없네.
침이나 내뱉어 사절하고 돌아가서
계수나무 숲에 높이 누움만 못하리라.

명예와 이익을 탐하는 이들의 행태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이들은 권세가의 집 대문을 발이 닳도록 드나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바른 길을 가고자 하는 이들이 뜻을 펼 수 있는 기회를 만나기는 참으로 어렵다. 김시습은 ‘눈에 가득한 것은 슬픈 일 뿐’이라며 세상의 흐름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언제나 푸른 상록수인 계수나무는 양심, 절개, 의리를 상징한다. 김시습은 또한 금강산 기행에서 세상이 인간에 대한 도리가 사라져 임금과 부모를 배반한다고 비판한다. 어쩌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꿈을 좌절케 한 수양대군의 계유정란과 왕위찬탈을 이렇게 비유하며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도리를 버렸고
세상은 임금과 부모를 배반했네.
가슴엔 삼생의 일이 막히고
머리엔 백척이나 티끌이 덮혔네.
세속 사람 되어서 보통 예대로
하나의 궁한 백성 되기만 못해라.

내금강을 돌아본 김시습은 다시 단발령을 넘어 철원으로 왔다. 금성현, 지금의 철원군에 있는 보리진을 건너 보개산과 심원사(지금의 석대사)와 석대암을 거쳐 경기도로 간다. 석대암은 신라 성덕왕 19년(720)에 사냥꾼인 이순석이 지장보살의 감화를 받아 출가하면서 지은 절이다. 산 것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순간의 깨달음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털어 절을 짓고 불제자로서 생을 마치기로 결심하고 절을 지은 것이다.

김시습은 1459년 말 겨울을 한성 부근에서 났다. 소요산, 도봉산, 삼각산, 수락산, 회암사를 둘러보았다. 특히 한동안 경기도 양주 회암사 동별실에 거주하면서 선정에 들었다. 회암사에서 김시습은 역사적으로 특별한 인물들을 여럿 만난다.

[참고]
<김시습 평전> 심경호
<김시습과 떠나는 조선시대 국토기행> 김재웅
<매월당 김시습> 이문구
<매월당 김시습> 이종호


ㄹㅇ 21c부여신문

소 종 섭
외산 출생, 부여고-고려대 졸업
전) 시사저널 편집국장
현)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회장
현) 인포마스터 사회적전략센터장
저서 <백제의 혼 부여의 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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