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나의 크리닉 뒷문을 열고 나가면 7~8평 크기의 작은 마당이 있다. 그 마당에는 창고로 사용하고 있는 컨테이너박스가 있고 그 옆에는 수도가 놓여져 있다. 2년 전 어느날 수도에서 손을 씻으려고 하는데 시멘트 바닥에 구더기 몇 마리가 눈에 띈다. 어디서 나오는지 추적해봤더니 컨테이너박스 창고 밑에서 나오는 것이다.
평소에는 조금씩 나오다가 비오는 날엔 빗물에 씻겨 내려와 제법 많은 구더기가 나온다. 창고 밑은 컴컴하고 창고 밑바닥과 시멘트 바닥의 간격이 10cm정도 밖에 되지 않아 창고 밑에 무엇이 있는지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약 2달간 구더기가 나오더니 멈췄다. 나도 그 후로 잊고 있었다.
그런데 일년쯤 지난 어느 비오는 날 고양이 두개골과 장골(femur)이 빗물에 쓸려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아마 수명이 다한 고양이가 안식할 곳을 찾다가 컨테이너박스 밑을 선택한 모양이다.‘킬리만자로의 표범’ 노래가사처럼 <산장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바람같이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우리 인간도 이처럼 뼈와 살을 이승에 살았던 흔적으로 벗어 놓고 가야하는 것이니 영혼이 떠난 육체는 더 이상 내 소유가 아니라 그저 우리가 생겨 나왔던 내 고향인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옛날에는 수행자들이 무덤가에서 도를 닦았다. 피부 한 껍질 아래에는 피와 고름과 체액과 분변이 가득함을 관(觀)하고, 해골을 보며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가 꿈 속의 꿈임을 알아차리고, 무상(無相·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함)과 무상(無常·세상에 변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을 관조했다. 따라서 탐욕과 분노가 허망된 것임을 보는 것, 이것을 부정관(不淨觀·우리 육체가 얼마나 더러운 것인가를 보는 것)이라 한다.
Ⅱ. 금년 5월이다. 야외가든 음식점에서 단체모임으로 바베큐 파티를 했다. 그릴에 고기를 굽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고소하게 코를 찌른다. 가든 주인집 고양이 두 마리도 고기가 먹고 싶은 모양이다. ‘야옹 야옹’ 주위를 맴돌며 야단이다. 고양이 한 마리는 작고 또 다른 한 마리는 작은 고양이보다 몸집이 두 배는 되어 보인다.
우리만 먹기가 미안해서 내가 고기 한 조각을 그들에게 던져주자 작은 고양이가 덥석 입에 물고 내뺀다. 다 먹고 돌아와서는 ‘야옹’거리며 더 달라고 보챈다. 이번에는 큰 고양이에게 고깃덩이를 던져주었다. 그런데 동작 빠른 작은 고양이가 또다시 낚아챈다. 고깃덩이 다섯 개를 큰 고양이에게 던져 주었지만 매번 작은 고양이가 물고 내빼니 큰 고양이는 고기 맛을 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작은 고양이에게 뺏기지 않으려고 큰 고양이가 애쓰는 모습도 없다.
설상가상 큰 고양이가 먼저 고깃덩이를 입에 물기라도 하면 작은 고양이가 털을 곤두세우며 ‘씩씩’ 소리를 내며 큰 고양이를 겁박한다. 그러면 큰 고양이는 입에 물었던 고깃덩이를 삼키지도 못하 고 그 자리에 내뱉고는 이내 동작그만이다. 한 가지 꾀를 생각해냈다. 고기 한 점을 멀리 던진다. 그러면 작은 고양이가 멀리 던져진 고깃덩이를 향해 달려가는 순간 그 틈을 이용해 고깃덩이를 큰 고양이 앞에 던져주자 그때서야 큰 고양이는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정글의 법칙대로라면 작은 고양이는 큰 고양이의 적수가 되지 못할 정도로 그 크기가 작다. 그런데도 큰 고양이가 작은 고양이에게 쩔쩔 매는 이유가 무엇일까?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물어봤더니... 허걱! 큰 고양이가 작은 고양이의 ‘엄마’란다.
![]() 박 철 신 충남의사협회 부회장 부여현대내과 원장 21세기 부여신문 독자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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