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4 21:55 (수)
[탐사기획] 정한모
[탐사기획] 정한모
  • 소종섭
  • 승인 2012.02.16 11: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 기행?[13]
부여는 역사와 문화, 정신의 고장이다. ‘패망한 나라 백제’의 쓸쓸함에 대하여 말하는 이들이 있으나 백제의 마지막은 비장했다. 멸망 이후의 항전 또한 치열했다. 반면 신라는 어떠했나.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나라를 스스로 고려에 바쳤다. 고려는 이성계의 쿠데타로 뒤집어졌다. 조선은 매국노들의 협력 속에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낙화암은 ‘패배’와 ‘비참함’의 상징이 아니다. 승자들의 역사 속에 그렇게 기록되었을 뿐이다. 낙화암은 차라리 목숨을 던질지언정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자존심’과 ‘항전’의 상징이다. 부여에는 낙화암처럼 잘 알려진 곳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알아야 할’ ‘새로이 의미를 부여할 만한’ 인물과 유적들이 많다.

우리는 성충, 흥수, 계백과 낙화암, 부소산, 궁남지, 정림사지 5층 석탑 등으로 상징되는 사비 백제 시대의 인물과 문화 유적에 대해 친숙한 편이다. 그러나 ‘백제’만이 부여의 전부는 아니다. 고려·조선 시대 그리고 그 이후에도 부여와 관련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은 때로는 서원에, 때로는 묘소에, 때로는 사찰에, 때로는 유적 없이 역사 속에 이름을 남겼다. 이제 이들을 재조명 해 그분들의 뜻과 정신을 되새길 때가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부여 정신’을 찾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격주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들’을 연재하는 이유이다.

구드래조각공원 삼정부여유스호스텔 앞 도로변에 위치한 시비. 21c부여신문

필자가 지난 12월 부여 청소년수련원에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을 주제로 강연을 할 때였다. 토론자로 참여한 윤준웅 부여문화원 원장이 “이런 뜻 깊은 강연회나 연재가 이제야 이루어진 점은 때늦은 감이 있다.

이제라도 널리 알려야 한다”라며 “현대사 인물 중에 신동엽 시인도 있지만 석성 출신인 정한모 시인도 훌륭한 인물이다. 다뤄볼 생각이 없느냐”라고 질문을 했다. 필자는 “조만간 보도하도록 하겠다”라고 답변했다. 정한모 시인은 시인으로도 유명하고 문화공보부 장관을 지내는 등 행정적인 면에서도 여러 업적을 남긴 부여가 낳은 위인 가운데 한 명이기 때문이다.

서울로 돌아와 정한모 시인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니 의외로 알려진 것이 많지 않았다. 벌써 돌아가신지 20년이 넘어서일까. 그래서 그가 석성 출신이라는 데 착안해 오랫동안 재경석성면민회장을 지내며 봉사해 온 천갑병 나누리장학문화재단 이사장(재경부여군민회 수석부회장·전 부여중고등학교 재경동문회장)께 “혹시 고 정한모 시인의 유족들의 연락처를 아는 분이 없을까요?” 하고 물었다. 항상 친절하기로 소문난 천 이사장께서는 “알아봐 주겠다. 기다려라”라고 말씀하셨다. 천 이사장은 며칠 뒤 정한모 시인의 아들과 부인의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천 이사장의 도움에 힘입어 서울 하월곡동에 있는 동덕여대 예술대 공예과로 정진원 교수를 찾아갔다. 1923년 10월 27일 부여군 석성면 석성리 635번지 평촌마을에서 태어난 정한모 시인은 딸 두 명, 아들 세 명 등 5남매를 두었다. 장남인 정 교수의 쌍둥이 남동생도 단국대 교수이다. 위로 누나가 두 명 있고, 막내 남동생은 정년퇴직했다.

다음은 정 교수가 전한 ‘내 아버지 정한모 시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2대 독자였던 할아버지는 아들 셋을 낳았다. 아버지(정한모)는 막내였다. 날때부터 머리가 커서 할머니가 아버지를 낳을 때 애를 먹었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할아버지가 할머니께 “(머리 큰 아이를)낳느라 고생이 많았으니 이제 그만 낳자”라고 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별명은 ‘대갈장군’이었다. 당시 할아버지는 일본에서 잡화상을 하고 있었다. 한국에 와 방앗간을 하고 싶어 했는데 일본인들이 전기를 대주지 않아 홧병으로 돌아가셨다는 말이 있다. 할아버지는 한창 때인 47세에 돌아가셨다.

이후 집안 일은 막내인 아버지가 도맡아 했다. 위에 형이 두 명 있었지만 큰 형은 사진기를 들고 다니며 찍는 등 신식공부를 한다고 밖으로 돌았고, 둘째 형은 석성우체국에 근무했는데 대필도 해주는 등 글씨를 잘 썼으나 성격이 활달한 편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누군가 나서서 해야 하는 일은 아버지가 처리하곤 했다.

아버지는 공부는 잘했다. 키는 작았지만 줄곧 반장을 했다. 어머니는 석성 아버지가 살던 바로 아랫집에 살았다. 동네 결혼을 한 셈이다. 너무 가깝게 살다보니 결혼식을 올릴 때 말을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고 한다.

일본 대판에 있는 나니와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55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한 아버지는 검사나 변호사 같은 직업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건 시를 썼다. 외할머니 묘를 이장하러 갔을 때 눈물을 흘리며 바로 메모지를 꺼내 메모를 하던 풍경이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는 자녀들의 자립심을 키워주는 스타일이었다. 대체적으로 엄격한 편이었다. 잔정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았고, 장관 시절에는 금지시켰던 것들을 많이 풀었다. 월북 작가들 작품 등을 공개적으로 다룰 수 있게 했다. 이런 탓인지 8개월 만에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정한모 시인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는 지난 해 11월 30일 서울에 있는 ‘문학의 집 서울’에서 있었던 정한모 시인 20주기 행사 때 동료 시인들이 했던 말들에서 어긋나지 않는다.
서울 혜화동 방송통신대학교 교정에 있는 정한모 시비. 21c부여신문

“고인은 시인협회장, 서울대 교수, 문혜진흥원장, 문화공보부 장관 등 다양한 일을 훌륭하게 수행한, 인간적으로 도타운 정을 느낄 수 있는, 시인협회의 기틀을 만들고 초석을 놓은 그러면서 시학(時學)을 통해 훌륭한 업적을 남긴 분이다”(이건청 시인협회 회장)

“믿을 수 있는, 정신의 내포가 깊은 장중하면서도 든든한 인간이었다. 22살에 만나 40년 동안 길벗으로 지냈다. 친구이면서 그의 성숙을 제 눈으로 보았다. 따뜻한 사람이었다”(김남조 시인)

“1948년 여름 서울대 문리대 강당에서 대학생 시낭송회가 열렸을 때 그를 처음 만났다. 내가 생각하기에 정한모 시인은 자유주의자였다. 어딜 들렀다가 집에 가는 길에 방향이 같아 차를 같이 탔는데 대학로에 다다르니 ‘한 잔 더 하자’라고 하기에 ‘나는 안 하겠다’했다. 그랬더니 ‘이만큼 살았는데 평생 좋아하는 것 안 할 필요가 있느냐’라고 하더라. 시인 중에 장관이 된 사람은 정한모가 유일하다. 학자로서의 업적도 탁월했고 능력이나 인품, 성실함을 두루 갖춘 분이다”(김종길 시인)

“장관 재직시절 국회에 나가 답변할 때 분위기가 무거웠는데 한 의원이 ‘앉아서 답변하세요’라고 하자 정한모 시인이 ‘저는 앉으나 서나 똑같습니다’해서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그는 후배들과도 카드놀이 하는 것을 즐겼다. 게임에서 지나 이기나 한결 같았다. 놀이 자체를 즐겼다. 대인이었다. 우리들은 정한모 시인을 작은 거인이라고 부르곤 했다”(허영자 시인)

“정한모 장관의 취임 일성은 납북 시인들을 해금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이 업적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그의 결단에 따라 문학사 반세기가 복원되었다. 시인협회장은 정한모 시인이 협회장을 맡기 전까지는 10년씩 하곤 했다. 그는 취임 뒤 ‘2년제 단임제로 하겠다’라고 공언했다. 또 후임에 조병화 회장을 모시고 본인은 심의위원장을 맡았다. 말이 그렇지 본인의 후임 회장 체제에서 위원장을 맡아 일한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언젠가 연수를 갔을 때는 밤을 세운 뒤에도 다음날 세미나에서 주제발표를 너끈히 소화하는 것을 보았다. 그 인품의 넓이와 크기, 깊이를 헤아릴 수 없던 분이 정한모 시인이었다”(이근배 시인)

아가는 밤마다 길을 떠난다.
하늘하늘 밤의 어둠을 흔들면서
수면(睡眠)의 강을 건너
빛 뿌리는 기억의 들판을,
출렁이는 내일의 바다를 날으다가
깜깜한 절벽,
헤어날 수 없는 미로(迷路)에 부딪히곤
까무라쳐 돌아온다.

한 장 검은 표지를 열고 들어서면
아비규환 하는 화약 냄새 소용돌이.
전쟁은 언제나 거기서 그냥 타고
연자색 안개의 베일 속
파란 공포의 강물은 발길을 끊어 버리고
사랑은 날아가는 파랑새
해후는 언제나 엇갈리는 초조
그리움은 꿈에서도 잡히지 않는다.

꿈길에서 지금 막 돌아와
꿈의 이슬에 촉촉히 젖은 나래를
내 팔 안에서 기진맥진 접는
아가야!
오늘은 어느 사나운 골짜기에서
공포의 독수리를 만나
소스라쳐 돌아왔느냐.

정한모 시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1965년에 발표한 ‘나비의 여행’이라는 시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아가’는 아들, 딸, 이웃, 형제 등 우리 삶 속의 인간을 의미하며, 진실함과 아름다움의 표상이다. 또한 ‘나비’는 꿈과 현실을 이어주는 가교이자 우리 민족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석성면 석성4리 마을회관 바로 뒷편에 위치한 선생의 생가.(석성향교 인근) 21c부여신문

정한모 시인은 8·15광복 직후 김윤성(金潤成)·구경서(具慶書) 등과 함께 동인지 <백맥(白脈)>을 발간하면서 등단했다. 그러나 195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멸입(滅入)>이 당선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58년 제1시집 <카오스의 사족(蛇足)>에 이어 다음 해 제2시집 <여백을 위한 서정>을 발간했다.

이 무렵 그는 바람이나 꽃·계절·산이나 시내 등 자연 소재들을 따뜻한 인간의 눈길이나 정을 담아 창작했다. 이런 바탕 위에서 일상적인 생활에 평범한 인간의 정을 실어 읊는 쪽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세계를 담은 작품을 수록한 것이 <아가의 방>(1970) <새벽>(1975) <사랑 시편(詩篇)>(1983) <아가의 방 별사(別詞)>(1983) <나비의 여행>(1983) <원점에 서서>(1989) 등이다.

정한모의 시세계는 ‘아가’로 상징되는 휴머니즘의 옹호와 생명의 탐구라는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있다. 그는 1983년 펴낸 <바람과 함께 살아온 세월>(문장사)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창작 작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넘어서기 어려운 벽에 부딪쳤을 때, 견디기 힘든 아픔을 당했을 때, 자기를 잃어버리고 껍질만의 육신으로 살아가고 있을 때, 수습할 수 없는 자기 혼란에 빠졌을 때 자기를 찾고 수습하고 아픔을 견디고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힘을 얻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맑은 물처럼 가라앉은 마음으로 자기를 돌아보며 글을 쓰는 일이 최상의 방법이 될 것이다.

현대인에게 그래도 아직 한 가닥 희망이 있다면, 물기 없이 시들어가는 초목에 수분을 공급하여 살아나게 하는 일처럼 우리 모두가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하루를 헛되지 않게 살아가게 하는 진실한 삶의 자세를 가다듬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한 최상의 방법은 글을 쓰는 일이다. 글 쓰는 일이 일상화되어 글과 하나가 되는 생활을 하는 사람에겐 힘과 질서가 언제나 봄의 자연처럼 생기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정한모 시인은 시인으로서의 활약 이외에도 대학 교수로서 문학 연구에 상당한 업적을 쌓았다. 1956년 5월부터 12월에 걸쳐 <문학예술>에 발표한 <문체로 본 동인(東仁)과 효석(孝石)>, 1964년 12월호 <문학춘추(文學春秋)>를 통하여 발표한 <김영랑론(金永郞論)> 등이 있다. 이들 문학 연구와 시론에 해당되는 글들은 뒤에 <현대작가연구>(1959)·<한국현대시학사>(1974) 등으로 발간됐다.

교육자로서, 그리고 문화 행정가로서도 그는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방송통신대학이 설립되자 학장으로 취임해 기구 확충, 교과목 내용 개편, 강의 운영의 개선에 힘썼다. 한국시인협회에도 관계하여 한때 사무국장을 맡았고, 이어 회장을 맡았다. 또한 제3대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원장으로 취임하여 문학예술 지원 사업을 관장하기도 했다. 예술원 정회원, 국어국문학회 대표이사, 한국비교문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1988년 문화공보부 장관이 됐다. 장관 퇴임 후에는 간행물윤리위원회 이사장으로도 일했다.

무엇보다 그의 업적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문화공보부 장관 재임 때에 월북 및 납북 문인들을 해금한 ‘납·월북 문인에 대한 해금 조치’를 입안, 공포한 것이다. 이것은 한국문단사에 길이 남을 용단이었다. 한국시인협회상(1971)·서울특별시문화상(1983)·대한민국예술원상(시 부문, 1987) 등을 수상했다.

세월은 흘러도 시인의 자취는 남아 고향의 이름을 만대에 빛나게 하고 있다. 부여 구드래조각공원 유스호스텔 앞 도로 변에는 정한모 시인의 시비가 있다. 아들인 정진원 동덕여대 교수가 조각한 작품이다. 관광시즌이면 시비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석성면 석성리에는 이곳이 시인이 태어난 곳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상대적으로 취약한 정한모 시인과 관련한 기념사업에 이제 부여인들이 좀 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정한모 시인 약력]
ㅍㅍ 21c부여신문

1923년 석성면 석성리 출생
1945년 <백맥(白脈)>에 귀향시편 발표하며 등단
1955년 서울대 문리대 국문학과 졸업
1973년 서울대 대학원 문학박사
1975년 서울대 인문대학 교수
1978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1984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원장
1988년 문화공보부 장관
1989년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장

● 상훈
1972년 한국시인협회상
1984년 서울시문화상
1987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90년 대한민국 문화상

● 저서
·시집
<카오스의 사족>(1958) <여백을 위한 서정>(1959)
<아가의 방>(1970) <새벽>(1975)
<아가의 방 별사(別詞)>(1983) <나비의 여행(旅行)>(1983)
<사랑시편>(1983) <원점(原點)에 서서>(1989)
·평론집
<현대작가연구>(1959) <현대시론>(1973)
<한국현대시문학사>(1974) <한국현대시요람>(1974)
<한국현대시의 정수>(1979) <한국현대시의 현장>(1983)
·수필집
<바람과 함께 살아온 세월>(1983)


kk 21c부여신문

필자 / 소종섭
1966년 외산 출신
부여고·고려대 졸업 시사저널 편집장
재경부여군민회 상임부회장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