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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광장] 기자와 돼지새끼 12마리
[목요광장] 기자와 돼지새끼 12마리
  • 이규원
  • 승인 2014.07.30 09: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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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행정체험 9>

1991년 12월 대덕구 토지관리과장으로 잘 있을 때 대전광역시 공보관실 홍보1계장(언론담당)으로 갑자기 발령되어 1년 간 몸 담았던 대덕구를 떠나게 되었다. 동료들이 현관에서 정문까지 도열하여 환송해주는 예우를 받으며 이별하였다. 市 공보관실은 3개 係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홍보기획(서무담당), 홍보1, 홍보2(시정신문발간)이었으며, ‘記者室’은 중앙지지방지로 나뉘어져 있었다. 언론담당 2년 6개월 간 市長은 洪善基 金柱鳳 廉弘喆 씨 순서로 부임하여 보좌하게 되었다.

매월 시장이 주관하는 출입기자 만찬 행사장은 의전계(총무과)에서 준비하고 안내는 홍보1계에서 하였다. 언제든지 시장이 ‘폭탄주’를 돌렸는데 다섯 순배쯤 되면 ‘주당’들만 남게 되었으며, 시장은 화장실에 가서 ‘반납’하고 돌아와 행사를 진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市長마다 언론을 대하는 자세가 달랐다. A씨는 비판기사에 민감해 하지 않았지만, 평소에 언론사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두는 ‘유비무환’형 이고, B씨는 큰 기사 터져도 반응 않는 ‘언론’이 가장 두려워 한다는 ‘무관심’형 이고, C씨는 이미지 관리에 힘썼으며 작은 기사오류에도 반드시 따지고 넘어가는 ‘안전운행’형 이었다. 직속상관 공보관을 4명이나 맞이해야 했다. 임영호(전국회의원), 이강호(전자치행정국장) 씨와는 손발이 맞아 업무 추진에 애로가 없었지만, 정년을 2~3년 앞두었던 박·김 씨와는 공직가치관 차이로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

언론담당하며 좋았던 것은 48명의 출입 기자들과 엉키어 지내는 동안 인맥을 넓히고, ‘취재지원’ 과정에서 市행정 전반을 스크린 하게 되고, 市長실을 프리패스 하는 것이었다. 어려움은 과도한 술자리 때문에 ‘위장병’이 생기고, ‘似而非記者’와 결전을 벌려야 하고, 비판기사 터질 때 市長에게 해명하고, 매년 명절날 구청 연두순시 기자 하계휴가 때 실국장과 구청장들한테 돈 걷어 기자실에 나누어 주는 책임이었다. 돈 걷는 나쁜 관행 개혁 못하는 자괴(自愧)감을 안고 지내야 했다. 그 관행 지금도 변형되어 엄존(儼存)할 것으로 추정된다.

바르게 사는 記者가 많지만 그렇지 않은 자도 있었다. ‘민방위훈련기피영장’과 ‘불법주차과태료통지서’ 던져놓고 해결해내라 윽박지르고, A방송 오 씨는 자기 상급자 장인 喪당했을 때 실국장과 구청장한테 연락해서 봉투 걷어 오라 압박하고, J일보 B간부는 월간화보를 실국과 구청사무실에서 구독하게 하라고 강압했으며, B방송 김 씨는 동구청 계장과 다투고 구청장을 기자실로 불러 닦달하기도 하였다.

1993년 3월 정부에서 사이비기자 소탕 작업을 하였다. ‘안기부대전지부’에서도 제보를 요청하였으며, ‘대전지방검찰청’ 김 특수부장검사는 공보관과 필자를 사무실로 불러 명단작성을 종용하였으나 “사이비기자 한 명도 없다”며 끝까지 함구하였다. 정보통인 그들이 모를 리 없고, 제보하면 ‘바가지’ 쓸 것 분명한데 발설할 일이 아니었다. 市의 제보 없이도 2개월 후 A방송국 오 씨는 ‘진주’로, 정 씨는 ‘안동’으로 쫓겨갔다가 그중에 한 명은 나중에 교도소도 거쳐야 했다.

1993년 6월부터 기자출신 유철희 ‘대전엑스포지역본부장’이 시청기자실을 가끔 방문하였는데 기자들은 반가워 하였다. 그때 유철희 씨가 한 ‘농담’이 재미있었다. “기자 12명을 서울에서 부산까지 안내하고 가느니 돼지새끼 12마리 몰고 가는 게 훨씬 쉽다”고 하여 좌중을 파안대소(破顔大笑)하게 한 그 말은 기자들에게 시사(示唆)하는 바도 있지만, 그 시절 기자의 위상과 행태를 ‘은유(隱喩)’한 풍자(諷刺)로 이해 되었다.

외부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ㅅㄹ 21c부여신문

이 규 원
전 부여군 기획감사실장
21세기 부여신문 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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