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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꿈꾸다 죽은 늙은이 - 김시습을 찾아서⑦
[기획연재] 꿈꾸다 죽은 늙은이 - 김시습을 찾아서⑦
  • 소종섭
  • 승인 2014.07.30 09: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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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북대암 옆에 작은 집을 짓고 머물다
1493년 매월당 김시습은 부여 무량사에서 59세로 생을 마쳤다. 조선 최고의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인 그의 면모는 사상가, 철학가, 종교인, 문학가, 여행가 등 실로 다양하다. 유교에 바탕을 두었으면서도 불문에 귀의에 <십현담요해> <화엄석제> 등 불교와 관련해 많은 수준 높은 저술을 남겼다. 도교에도 정통한 그는 ‘한국 도교의 鼻祖’로 불린다. 전국을 유람하면서 남긴 시가 남아 있는 것만 2,200수가 넘는다.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와 ‘애민의’‘인군의’ 등 많은 수필도 남겼다. 홍유손은 선생을 기리며 쓴 제문에서 ‘기암괴석과 이름난 물은 공께서 감상하신 뒤에야 비로소 빛나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전국 팔도에 선생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김시습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놀고먹는 이들을 경멸하며 노동의 신성함을 예찬했다. 자리만 누리는 권력자들을 조롱하며 “어떻게 저런 인물이 자리를 맡았나” 하고 한탄했다. 역사 속에서 지조와 광기의 천재로 상징화 된 그는 자유인이며 비판자, 동시에 왕도정치가 구현되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꿨던 이상가였다. 선생은 스스로를 ‘夢死老’ 즉, ‘꿈꾸다 죽은 늙은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착안해 <꿈꾸다 죽은 늙은이- 김시습을 찾아서>라는 기획연재의 제목을 따왔다. 과거 속에서 현재를 돌아보는 인문기행이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부탁드린다.


월정사 : 김시습은 오대산이야말로 몸을 숨길 만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한동안 집을 짓고 머물렀다. 21c부여신문

상원사에서 바라본 오대산 : 김시습은 오대산이야말로 몸을 숨길 만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한동안 집을 짓고 머물렀다. 21c부여신문

나옹 선사 흠모하며 정진, 1460년 <유관동록> 지어

26세의 김시습은 구름을 따라 강산의 산하를 떠돌았다. 울분을 가슴에 품고 방랑을 떠난 지 벌써 5년째. 마음에 응어리진 원망과 한탄은 많이 삭혀졌으나 시대를 잘못 만난 운명적인 쓸쓸함은 늘 그의 곁을 맴돌았다. 산하 어디를 가나 만나는 배고픔과 가난에 힘든 삶을 영위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며 왕도정치의 이상을 떠올렸으나 그가 현실정치에 나아갈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떠도는 구름과 흐르는 물을 따라 국토의 산하를 걸으며 글을 쓰고 시를 남기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김시습의 젊은 날은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갔다.

김시습은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 머물다 용문산 용문사, 여주 신륵사, 원주 동화사, 치악산 각림사를 거쳐 오대산으로 간다. 오대산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동쪽 계곡의 울창한 수림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동대 만월산을 뒤로 하고 그 만월산의 정기가 모인 곳에 고요하게 들어앉은 월정사는 사철 푸른 침엽수림에 둘러싸여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그 앞으로는 맑고 시린 물에서 열목어가 헤엄치는 금강연이 또한 빼어난 경관을 그리며 흐르고 있다. 월정사를 품고 있는 오대산은 자연조건이며 풍광이 빼어날뿐더러 예로부터 오만 보살이 상주하는 불교성지로서 신성시 되어 왔다.

월정사는 그 오대산의 중심 사찰로서 신라 때부터 지금까지 1400여 년 동안 개산조 자장율사에서부터 근대의 한암, 탄허 스님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름난 선지식들이 머물며 수행 정진하던 곳이다. 요즘에는 ‘천년의 숲’으로 널리 알려진 전나무 숲이 유명한 곳이다.

월정사는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니 그 때가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이다. 자장율사는 636년 중국 오대산으로 유학을 가 그곳 문수사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친견한다. 자장율사는 “너희 나라 동북방에는 일만의 내가 상주하고 있으니 그곳에서 다시 나를 친견하라”는 게송을 문수보살로부터 듣는다. 그래서 신라에 돌아오자마자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오대산에 들어가 임시로 초가를 짓고 머물면서 다시 문수보살을 만나기를 고대하며 정진하였다.

그러나 자장율사는 끝내 문수보살을 친견하지 못하고 태백산 정암사에 들어가 입적하게 된다. 비록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하는 뜻은 끝내 이루지 못했으나 이로부터 월정사는 오대산 깊은 계곡에 터를 잡게 되었다. 오대산은 비로봉, 동대산, 호령봉, 상왕봉, 두루봉 등 5개 봉우리의 너른 품에 중대(지공대), 동대(만월대), 서대(장령대), 남대(기린대), 북대(상심대) 등 평평한 대지가 둘러싸고 있어서 오대산이라고 부른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있다.

월정사 주차장에서 금강교를 건너다보면 왼쪽에 보이는 연못이 하나 있다. 금강연이다. 예전에는 금광연이라고 했는데 오늘날에는 금강연이라 부른다. 수온이 낮은 곳에서만 사는 냉수성 어류인 열목어가 서식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 물고기를 이곳 주민들은 ‘연메기’라고 부른다. 김시습은 봄물이 콸콸 쏟아지고 온 산에 철쭉꽃이 붉은 오대산의 봄 풍경을 시에 담았다.

1백길 얼음 벽 아래 다시 물이 감도니
도화랑(얼음 녹은 봄물)이 우레같이 거세다.
산 가득한 철쭉은 타는 듯 붉구나.
우문(용문) 물고기가 아가미를 볕 쪼일 때로세.

월정사에서 김시습은 불로장생에 관심을 갖고 신선의 방술을 배우고자 노력하기도 한다. 그는 도교에도 관심이 있었다.

구슬 망은 영롱하여 보수(寶樹·보물 나무)를 장식하고
천화(天花·눈)는 아득하게 예상(霓裳·신선의 옷)에 떨어지네.
신선산은 멀리 사람 사는 곳과 떨어졌으니
원컨대 청낭의 옥 먹는 법을 배우고 싶네.

김시습은 중대, 서대, 남대, 동대, 북대를 모두 돌아보고 시를 읊었다. 다음은 북대를 읊은 시이다.

북대에는 사월에도 남은 눈이 쌓였는데
푸른 나물 흰 구리때 흙을 이고 나오네.
나옹대 가에는 높은 구름 떠 있어
높고 깊고 아득하여 측량하기 어려워라.

금강연 : 월정사 초입에서 만나는 금강연에는 열목어가 살고 있다. 김시습은 봄물이 솟는 것을 보면서 시를 지었다. 21c부여신문

김시습은 봄물이 드는 오대산을 떠나 대관령을 넘어 강릉으로 갔다. 강릉은 김시습의 시조인 명주군왕 김주원의 묘가 있는 곳이다. 어릴 적 한때 강릉 부근에 머문 적도 있다. 홍제원에 이르러 “바닷가 흰 갈매기가 나와 같이 한가하여, 기심(간교하게 책략을 꾸미는 마음) 잊고 마주 대하여 봄볕 아래 희롱하누나” 하는 시를 지었다. 갈매기나 나나 한가롭기는 마찬가지라는 자조였다. 하루 종일 바다를 바라보며 노닐었다. 막 돋아난 죽순을 입에 넣어 씹어보며 봄을 맛보기도 했다. 문수당, 한송정, 경포대 등을 둘러보며 인생의 무상함을 노래했다.

김시습은 경포대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것 같다. ‘파랑새’ ‘고래의 희롱’ ‘해돋이’ 등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파랑새’는 이렇게 시작한다.

꿈에는 부용성(신선이 산다는 곳)에서 보허곡(도사가 허공에 걸어다니는)을 들었더니
잠 깨자 처음으로 파랑새 소리 듣는 구나.
아름다운 그 목소리 붉은 살구나무에 맑은데
지붕 머리에 비낀 해는 숲을 뚫고 환하네.
처음엔 박명함을 원망하듯 호소하듯
···

김시습은 2~3달을 강릉에 머물렀다. 그리고 그 해 여름 다시 오대산으로 온다. 그가 왜 강릉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고 오대산으로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탁 트인 바다를 보며 슬픔이 저며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김시습의 일생은 ‘바다’보다는 ‘산과 냇물’이 더 친근했다. 오대산이 그랬고 금오산이 그러했다. 수락산과 무량사도 마찬가지였다. 김시습은 오대산이야말로 자취를 감출만한 곳이 아닐까 생각했다.

산 속에 밤이 깊어
찬이슬 기운이 옷에 엄습한다.
둥지 새는 놀라 꿈을 깨고
반디는 낮은 담을 넘어 지나간다.
안개 걷히자 일만 골짜기 고요하고
달이 밝아 오봉(오대산)이 서늘하구나.
어느 곳이 참으로 숨을 만한가
소나무와 삼나무 향기 10리에 풍기는 이곳.

적멸보궁 : 오대산 상원사에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있다. 21c부여신문

김시습은 이곳에서 나옹화상이 지니고 다녔다는 향반(밥그릇)과 승상(끈으로 엮은 침상)을 보고 공경했다. 나옹 선사의 법명은 혜근이고 나옹은 호이다. 1320년 정월에 태어났다. 어릴 적 친구의 죽음을 접하고 인생의 무상함을 느껴 공덕산 묘적암에서 요연선사를 스승으로 출가했다. 회암사에서 4년 동안 정진해 깨달음을 얻었고, 28세 때 원나라에 들어가 지공에게서 2년 간 불법을 배웠다. 10년 동안 원나라에 머문 나옹은 1358년 공민왕 7년 귀국했다.

공민왕의 부름을 받고 동방제일도량이라는 송광사에도 머물렀고 평양, 동해, 오대산 상두암 등 전국 각지에 법을 전했다. 회암사를 크게 중수했고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했다. 김시습은 그를 존경했다. 항상 무쇠 같이 강한 자세로 정진했던 수행 자세, 세간의 옳다 그르다는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추구하는 신념을 굳건하게 가는 신념, 일각에서 ‘석가모니 부처의 후신’으로 칭했을 정도로 불교도들로부터 열렬한 숭배를 받던 인물 등이 나옹의 모습이다.

김시습은 아마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나옹을 좋아했던 것이 아닐까. 그 유명한 ‘청산은 나를 보고’라는 시를 지은 이가 나옹 선사이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憎兮(요무애이무증혜)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怒而無惜兮(요무노이무석혜)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나옹대 : 오대산 북대 미륵암 옆에 있는 나옹대는 나옹 선사가 수행하던 곳으로 전해진다. 21c부여신문

오대산 북대 상두암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나옹대(懶翁臺)가 있다. 나옹 스님이 공부하던 곳이다. 자연 석축에 돌을 쌓아 평평하게 하고 그 위에 판자를 깔았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적멸보궁 지붕이 보이는데 나옹 스님은 날마다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뒤에 음식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김시습은 중흥사를 떠난 이후 처음으로 오대산 북대암에 작은 집을 짓고 머물렀다.

작은 당집 처음으로 지어 놓으니
뜰 나무에 우는 새 소리를 듣네.
벌써 이미 삼생의 원을 걸고서
한 가지 마음으로 참여하였네.

손수 나물을 땄으며 산중 암자에 거처하는 순로, 여로, 전선로 등 여러 선사들과 깨달음에 대하여 토론하며 자신의 감흥을 시로 읊기도 했다. 어느 곳이 과연 은둔하기에 적합한가에 대해 토론하자 전선로는 강원도 정선의 벽파산이 은둔처로 더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전선로의 말을 들으며 김시습은 문득 세상 어느 곳에도 진정으로 숨어들 곳은 없구나 생각했다. 그는 훌훌 오대산을 떠나 평창의 백양진에 있는 평창관에서 하룻밤을 묵고 영월을 거쳐 주천현 누각에 오르는 등 다시 방랑길에 올랐다. 관동을 두루 둘러본 뒤 추석이 가까워 달이 둥근 밤, 김시습은 외롭고 고단함을 느꼈다. 이때 지은 시가 ‘길을 가다가(途中)’이다.

관동의 산을 다 돌자
남국의 달이 비로소 둥글었군.
눈 아래엔 봉우리 무수하고
허리춤엔 엽전 차고 나다니는 몸.
앉은 자리 따뜻하지 못한 지 오래
폐부에선 온종일 달군 김이 나오고
떠도는 이 생활을 어느 때 다하여
초가 포단에 앉아 1만 인연 그치랴.

천년의 숲길 : 오대산 전나무들로 이루어진 숲길은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인기 코스이다. 21c부여신문

1460년(세조 6년) 9월, 김시습은 그 해 봄부터 9월까지 관동을 유람하면서 쓴 시들을 모아 <유관동록>으로 정리했다. 그는 <유관동록> 후지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나라는 산수가 맑고 고와서 달인(達人)과 군자들이 흠모했다. 공자도 구이(九夷·동방의 이민족을 지칭)에 살고 싶다고 했다. 심지어 속말에 따르면, 어떤 중국인은 “고려국에 태어나서 직접 금강산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천석(泉石)이 맑고 시원하여 비루하고 옹색한 가슴을 씻어낼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나는 관서에서부터 와서 다시 관동으로 들어가 금강산·오대산에 노닐면서 명승지를 찾아보았는데, 산 모습은 기괴하고 시내의 물빛은 영롱했으며, 개심대의 높은 폭포와 풍령(설악)의 흰 바위, 명연(鳴淵)에 괸 물은 모두 사람의 마음과 눈을 씻어줄 수 있었다. 그런데 골짜기가 깊고 나무숲이 조밀하여 속인이 거의 이르러 오지 않은 곳으로는 오대산이 가장 훌륭하였다.

김시습은 또한 <유관동록> 후지에 드넓은 바다를 보며 인간의 왜소함을 느낀 일을 기록했다. 총석정과, 삼일포를 둘러보지 못한 일을 애석해 하면서 누구 탓이 아닌 ‘뜬구름 같은 자취로 동으로 번쩍 서로 번쩍 하기에 이렇게 됐을 뿐이다’라며 스스로를 책망한다.

관동기행을 마친 김시습은 중부 지방을 통해 호남으로 간다. <유관서록> <유관동록>에 이은 <유호남록>을 쓰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참고] <김시습 평전> 심경호
<김시습과 떠나는 조선시대 국토기행> 김재웅
<매월당 김시습> 이문구
<매월당 김시습> 이종호
<길 위의 노래> 정길수 편역
<오대산> 월정사

ㅎ 21c부여신문

소 종 섭
외산 출생, 부여고-고려대 졸업
전) 시사저널 편집국장
현)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회장
현) 인포마스터 사회적전략센터장
저서 <백제의 혼 부여의 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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