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당연히 화두의 답이 나오질 않는다. 하지만 1년, 2년... 화두참선을 하다보면 화두가 타파(화두의 의심이 해결됨)되고 꽉 막혔던 그동안의 의심들이 한꺼번에 풀려,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리게 된다. 이때가 만물의 이치를 알게 되는 견성(見性)의 단계이다.
하지만 화두가 타파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시간은 헛된 시간이 아니다. 참선을 하면 좋은 점이 많다. 참선을 하면 괴로움, 불안감, 집착, 화 등이 사라지고 집중력, 분석력, 창의력이 생겨난다. 세상일은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세상 만물의 이치와 욕심 많은 내 마음의 이치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만물의 이치를 모르니(무명, 無明) 세상이 무섭고, 싫고, 원망스럽고, 분노까지 들게 된다. 욕심을 버려야 행복하다. 마음속에 바라고 구하는 것이 없어야 세상이 즐겁다. 남들보다 잘 살아야겠다는, 자식을 최고로 키워야겠다는, 권력과 명예를 얻겠다는, 자존심을 세워야겠다는 등등... 욕심들이 문제이다.
설법제일 부루나존자의 말을 빌리면 “남이 나에게 침을 뱉으면 그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바로 닦아내면 그 사람의 분노가 더 일어나게 되니 침이 마를 때까지 닦아내지 마라”고 했다.
무상(無常) : 만물은 항상 그대로 머물지 않고 성, 주, 괴, 공, 변해간다.
고(苦) : 깨치지 않는 한 사바세계(감인의 세계, 견디고 인내해야 하는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고통의 연속이다.
무아(無我) : 나라는 것은 인(因, 직접적인 원인)과 연(緣, 어떤 부모를 만나는가, 내가 태어난 나라, 자라온 환경 등 간접적인 원인)과 전생의 업(과거 생에 지은 선과 악의 과보)이 어우러져 찰나적인 존재(中道, 중도)로 잠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니 나의 자성(自性 : 타고난 스스로의 본래 성질)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이 몸뚱이는 본래 내 것이 아니다. 무상, 고, 무아를 마음으로 완전히 받아들이고, 몸에 배게 되면 이 때가 바로 견성(見性)의 단계이다. 견성을 하면 수행을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세상의 이치를 확연히 보고 깨달은 견성(見性)의 경지는 아라한 정도의 경지이지만 붓다의 경지는 아직 아니다.
우리는 다겁생으로 내려오면서 입은 은혜와 갚아야 할 빚이 많다. 본래 내 것도 아닌 이 몸뚱이 비위를 맞추느라 많은 죄악을 짓고 살았다. 죄악으로 혼탁해져 있는 나의 영혼을 맑고 영롱한 영혼체로 만드는 것이 진정한 수행이다.
견성 후 맑은 영혼체까지 갖게 된다면 아라한이 아닌 붓다(깨달은 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붓다의 단계는 참선과 화두타파만으로는 오르기 힘들다. 즉 절대자(태양보다 그 밝기가 수억겁배인 무량광으로 이루어져 있는 절대계의 교주)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타력수행인 정근(精勤, 염불)수행도 중요하다. 정근수행(절대자의 이름을 계속 부르는 것을 화두 삼아 정진하는 것)을 하면 절대자의 가피(도움)를 받아 과거 생에 받은 은혜에 보답하고 업장의 소멸이 가능하다.
그리되면 니르바나(열반, 해탈)의 경지(붓다)에 좀 더 쉽게 다다를 수 있다. 화두참선을 통해 견성(見性, 깨달음, 세상의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을 하고 나서 붓다가 된 것처럼 우쭐댄다면 잘못된 것이다.
견성의 경지는 수행의 높은 경지이긴 하지만 궁극적인 최종 목적지는 아니다. 견성 후에 정근(精勤, 염불) 수행을 한다면 전생에 입은 빚을 갚을 수 있고, 업을 씻을 수 있고, 나쁜 습기를 정화할 수 있고, 악의 기운을 없애고, 마장(악마나 사탄의 장애)을 막을 수 있다.
이처럼 참선의 자력수행과 정근(精勤, 염불)의 타력수행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면 완벽한 성불(成佛)에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박 철 신 충남의사협회 부회장 부여현대내과 원장 21세기 부여신문 독자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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