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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꿈꾸다 죽은 늙은이 - 김시습을 찾아서⑨
[기획연재] 꿈꾸다 죽은 늙은이 - 김시습을 찾아서⑨
  • 소종섭
  • 승인 2014.09.03 09: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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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매화를 노래하며 ‘梅月堂’ 당호(堂號)를 짓다
1493년 매월당 김시습은 부여 무량사에서 59세로 생을 마쳤다. 조선 최고의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인 그의 면모는 사상가, 철학가, 종교인, 문학가, 여행가 등 실로 다양하다. 유교에 바탕을 두었으면서도 불문에 귀의에 <십현담요해> <화엄석제> 등 불교와 관련해 많은 수준 높은 저술을 남겼다. 도교에도 정통한 그는 ‘한국 도교의 鼻祖’로 불린다. 전국을 유람하면서 남긴 시가 남아 있는 것만 2,200수가 넘는다.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와 ‘애민의’‘인군의’ 등 많은 수필도 남겼다. 홍유손은 선생을 기리며 쓴 제문에서 ‘기암괴석과 이름난 물은 공께서 감상하신 뒤에야 비로소 빛나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전국 팔도에 선생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김시습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놀고먹는 이들을 경멸하며 노동의 신성함을 예찬했다. 자리만 누리는 권력자들을 조롱하며 “어떻게 저런 인물이 자리를 맡았나” 하고 한탄했다. 역사 속에서 지조와 광기의 천재로 상징화 된 그는 자유인이며 비판자, 동시에 왕도정치가 구현되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꿨던 이상가였다. 선생은 스스로를 ‘夢死老’ 즉, ‘꿈꾸다 죽은 늙은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착안해 <꿈꾸다 죽은 늙은이- 김시습을 찾아서>라는 기획연재의 제목을 따왔다. 과거 속에서 현재를 돌아보는 인문기행이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부탁드린다.


원효대사 기리며 다인(茶人)생활, 법화경 언해, 원각사 낙성식 참석차 두 번 서울 다녀가기도

경주 남산 용장사터를 찾아 답사에 나선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회원들이 용장사 3층 석탑에서 기념 촬영했다. 21c부여신문

28세인 1462년 가을에 매월당 김시습은 경주로 갔다. 관서-관동-호남 경주는 김시습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는 곳이다. 강릉 김씨 가문의 시조인 김주원(명주군왕이라고 불리며 묘소가 강릉에 있다)이 나고 자란 곳이 바로 경주이기 때문이다.

김주원은 선덕왕이 죽자 후임 왕으로 결정되었으나 권력 내부에 갈등이 생기면서 김경신(훗날 원성왕)에게 밀려 모친의 관향인 명주(강릉)로 이주했다. 원성왕은 김주원에게 명주의 9군 25현을 식읍으로 줬다. <고려사>에는 고려 태조 왕건도 김주원 집안을 두려워했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명주 일대에서 강성한 세력을 형성했다.

김주원은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6세손이고 김시습은 김주원의 22대손이다. 김주원에게는 종기, 헌창, 신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김신이 김시습의 21대조이다. 김시습으로서는 경주에 와 자신의 뿌리가 이곳이라는 자각을 했을 만하다.

경주에서 김시습의 거처는 금오산(경주 남산) 중턱에 있는 용장사였다. 용장사 옆에 경실(經室) 하나를 얻어 지친 몸을 뉘였다. 용장사는 남산 서쪽 중턱에 있는 절로 유가종(瑜伽宗)의 고승인 대현이 오래 거주하며 불법을 폈던 사찰이다.

경주 남산은 높이가 468m인데 용장사로 바로 올라가는 길은 시냇물을 따라 길게 뻗어 있다. 경치는 볼 것이 없지만 깊은 숲길을 참선하듯 올라가는 길이다. 삼릉 쪽에서 올라가면 수려한 경치와 불상 등 남산의 각종 불교 유적들을 보면서 그 유명한 용장사 3층 석탑을 지나 하산길에 접어드는 시점에 용장사터를 만난다.

이곳이 용장사터라는 팻말이 없다면 수풀만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어 용장사터라는 것을 알기 힘들다. 과거에는 어땠는지 모르나 현재 면적만으로는 절터로 보기에 터가 좁다. 터라도 잘 정비해 이곳이 <금오신화>의 산실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릴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합천 해인사에 들른 뒤 경주로 온 김시습이 처음부터 용장사에 거처를 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경주 남산 서쪽 자락인 선방사에서 겨울을 보내고 봄이 되자 선덕여왕이 창건한 영묘사(경주시 사정동)에 머물며 월성, 포석정, 박혁거세의 묘인 오릉, 경순왕의 사당, 계림 등을 둘러보았다. 첨성대, 백률사, 공자 사당, 김유신의 무덤, 분황사 석탑, 선덕여왕릉, 가문의 시조인 김주원이 살던 집터, 천룡사….

용장사터 : 김시습 선생이 머물며 를 지은 용장사터는 지금은 수풀만이 우거져 있다. 21c부여신문

이런 뒤 김시습은 용장사가 그 중 지낼만하다고 생각되어 거처로 정한 것이다. 산 속에 있어 번잡하지 않고 긴 시냇물이 이어져 있어 사색하기 좋으며 정상이 멀지 않아 멀리 조망하기 좋은, 그리고 노동을 할 만한 땅이 있는 그런 곳이 용장사이다. 용장사가 자리 잡은 위치는 김시습이 수락산에 머물 때 거처로 삼았던 폭천정사의 위치와 유사한 점이 많다.

경주로 온 이듬해인 1463년 봄 김시습은 ‘용장사 경실에 거처하면서 느낌이 있어서’라는 시를 썼다. 그는 고독하지만 평온한 일상을 이렇게 노래했다.

산이 깊고 으슥하여
용장사를 찾아오는 이 없네.
가랑비는 시냇가 대숲으로 옮아가고
살랑 부는 바람은 들판 매화를 보호하지.
작은 창 아래서 사슴과 함께 잠들고
마른나무 의자에 먼지와 함께 앉았다.
어느새 처마 아래의
뜨락 꽃은 졌다가 또 피는구나.

김시습이 용장사에 머물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절 주위에 꽃을 심는 일이었다. 경실 부근에 매화와 장미를 심었다. 경실 북쪽에는 잣나무를, 남쪽에는 삼목을 심었다. 죽순을 보호하고 뜰의 대를 씻어주었다. 김시습은 매화를 사랑했다. 남산에 머물 때부터 김시습은 자신의 상징물로 매화를 노래하기 시작한다.

김시습이 용장사에 머물 때 지었던 집의 이름(堂號)이 ‘梅月堂’이다. 매화는 청사(淸士), 은일(隱逸), 은둔(隱遁)을 상징하는 꽃이다. 매화를 사랑한 사람으로는 송나라 사람 임포(호 화정)와 육유(호 방옹)가 꼽히는데 김시습은 일찍부터 육유의 매화시를 암송했다고 시에 썼다.

내 일찍이 육방옹처럼 미쳐서
삼십 년 동안 매화와 격의 없이 지냈거늘
오늘 그대(매화)를 보니 다시 뜻이 각별해
내일은 하상(술잔)을 들고 찾으리라.

김시습은 매화에서 자신의 이상을 보았다.

꽃 필 때 품격은 뭇 꽃 중에 빼어나고
열매는 간 맞춰 음식 맛 향기롭네.
시종 큰 절개를 보존하니
다른 방초가 어이 짝하랴.

김시습은 매화의 품격과 매화를 찾아나서는 즐거움을 노래한 시를 14수나 연이어 썼다. 매화가 한창인 것은 사람이 벼슬길에 들어서서 학덕과 재식을 발휘하는 것, 매실로 음식 맛을 맛나게 하는 것은 원숙한 재상의 풍모를 말한다. 김시습은 자신이 원했으나 이루지 못했던 이상과 꿈을 매화와 동일시했다.

‘절대로 바람결에 말발굽을 쫓아가지 말아라.
가는 것은 좋다만 꾐 받음은 잘못이네.
한번 진흙에 더럽혀진 뒤로는,
올곧은 이름이 비방을 받게 되지.’

(매화 꽃잎이 바람에 떨어져 말발굽에 짓밟혀 진흙에 더렵혀지는 것을 보면서 쓴 시)

경주 남산 : 불교 문화 유산의 보고인 경주 남산에는 숱한 마애불과 불탑 등이 있어 지금도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는다. 21c부여신문

김시습은 경주 남산에 머물면서 분황사에 있던 화쟁대사, 즉 원효대사의 비를 보고 성(聖)과 속(俗)을 넘나들며 매임이 없었던 원효의 삶을 추모하며 무쟁비(無諍碑)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걸림 없는 자유인의 삶을 산 원효는 매월당 김시습에게 큰바위 얼굴과 같았다.

‘그대는 못 보았나 신라 이승 원욱(원효)씨가 머리 깎고 신라 저자에 도를 행한 것을. 당에 가서 불법(佛法) 배워 고국으로 돌아와 승속을 넘나들며 민간에 다니매~(중략) 나는 옛 도를 좋아해 뒷짐 지고 읽을 뿐 서쪽에서 오신 분(달마, 깨달음)을 보지는 못하누나’

용장사에 머물면서 김시습은 산을 개간해 차나무를 심었다. 다신(茶神)으로 추앙되는 당나라 육우의 다경(茶經)을 열심히 읽었다. ‘차를 기르며(養茶)’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김시습이 특히 좋아한 차는 작설차였다. 차를 그늘에서 키우기 위해 일부러 울타리를 치기도 했다. 그는 차의 여러 면모를 사랑해 차 꽃의 아름다움까지 읊었다. 지금도 차를 즐기는 이들이 김시습을 다인(茶人)의 원조로 여기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김시습은 경주 남산에 머무는 동안 두 번 서울에 다녀갔다. 1463년 가을 호남을 유람하면서 지은 지를 <유호남록>으로 엮은 뒤 첫 번째 상경한다. 이때 김시습이 만난 사람은 효령대군이다. 세종의 둘째 아들인 그는 당시 임금이었던 세조의 큰아버지였는데 66세로 왕과 왕실의 존경을 받으며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가 왜, 어떻게 29세의 젊은 김시습을 만나게 되었는지는 기록에 없다. 김시습은 효령대군의 추천을 받아 궁중의 내불당에 머물며 세조가 추진하던 <묘법연화경(법화경)> 언해 사업에 참여했다. 언해 사업은 신미와 수미 대사가 중심이 되어 추진됐다. 김시습은 이 경을 믿으면 누구나 부처가 되어 영원히 안락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하는 <묘법연화경(법화경)>과 관련이 깊다.

부여 무량사에서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도 그는 <묘법연화경(법화경)>에 발문을 남긴 것이 상징적이다. 김시습은 ‘상불경보살품’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의 불교 사상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법에는 높고 낮음이 없고, 모든 부처는 중생의 마음 속에 있다. 중생들이 그때 그때 부처를 이루어, 나와 남의 상(相)을 떠난다. 중생들의 몸 안에서 모든 부처가 생각 생각마다 참을 증득한다.’

열흘 정도 <묘법연화경(법화경)> 언해 사업에 참여하고 경주로 돌아온 김시습은 1465년 봄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지었다. 장소는 용장사 옆이나 천룡사 옆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직후인 1465년 5월 효령대군의 명령을 받은 경주부 관리들이 김시습을 찾아와 원각사 낙성회에 참석해달라는 효령대군의 청을 전한다. 한양으로 상경한 그는 도첩을 받아 승려로서 신분을 인정받았다. 원각사 낙성식에 참석했을 때 효령대군의 청을 받아 지은 시가 전한다.

시가에 버려졌던 급원(절터)이
성군의 큰 계획으로 만만년 가게 되었도다.
솜옷에 둥근 머리는 부처님 만나는 날이요.
치건에 도포 입고서 요순시대를 송축하네.
향연은 어가 따라 너울거리고
서기는 불상을 감싸 면면하구나.
일민(逸民)이 참여할 줄 누가 알았으랴.
오색 구름 꽃 속에 주선함이 즐거워라.

용장골에 있는 안내문 : 용장골에는 김시습 선생이 지은 시를 오가는 이들이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21c부여신문

김시습은 세조가 불의의 방법으로 정권을 잡은 것에 분노했지만 태평성대가 오기를 기대했다. 이 시에서 세조를 ‘성군’ ‘요순시대’라 칭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김시습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세조를 칭송한 이런 시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를 놓고 논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낙성식이 끝난 뒤 서울 근교에 머물며 서거정과 교유하고 회암사와 송도 천마산에 있는 산사들을 돌아본 김시습은 어느 날 경주로 돌아가고픈 생각이 들었다. ‘옛 동산이 그립다’는 시를 쓰게 된 배경이다.

금오산 아래 나의 오두막
죽순과 고사리 살찌고 푸성귀 넉넉한 곳.
장석이 고향 말로 신음했을 적보다 마음 절실하고
장한이 가을날 고향 그리던 마음보다 더하다.
고향의 매실과 살구는 익어 떨어졌을 텐데
나그네 주머니에는 동전 한 닢 없구나.
구름 천리 동쪽을 바라보매
물과 구름 깊은 그 곳, 돌아가고 싶어라.

1465년 가을 그는 금오산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금오산으로 돌아가자마자 그는 10여 일을 앓아누웠다. 긴 여정의 여독 때문일 수도 있고 서울 생활에서 못 볼 것을 많이 보아 괴로움과 쓸쓸함, 상심이 더욱 깊어진 것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이후 1471년(성종 2년) 다시 서울로 향하기까지 그는 금오산에 머문다. 원성, 평해, 망양정, 법광사를 방문했고 울진 성류굴, 강원도 정선까지 가기도 했다. 그냥 경주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동해에서 강원도까지 발걸음을 쉬지 않았다. 김시습은 1473년(성종 4년) 서울 수락산 폭천정사에 머물 때 <유금오록>을 지었는데 이때 후지에 금오산 시절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금오산에 있은 뒤로 멀리 나가 노니는 것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한기에 몸이 상하여 질병이 잇따랐다. 그러나 바닷가에서 느긋하게 노닐고 옛 도읍의 교외에서 마음껏 서성이면서 매화를 찾고 대를 심방(찾아보는 것)하여 항상 시를 읊고 취함으로써 스스로 즐겨하였다.’

금오산 시절 김시습은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다.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쓴 것이다. 다음 호에 이 이야기를 해보자.

[참고] <김시습 평전> 심경호
<김시습과 떠나는 조선시대 국토기행> 김재웅
<매월당 김시습> 이문구
<매월당 김시습> 이종호
<길 위의 노래> 정길수 편역
<금오신화> 김경미 옮김

ㅕㅛ 21c부여신문

소 종 섭
외산 출생, 부여고-고려대 졸업
전) 시사저널 편집국장
현)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회장
현) 인포마스터 사회적전략센터장
저서 <백제의 혼 부여의 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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