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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꿈꾸다 죽은 늙은이 - 김시습을 찾아서 ⑩ 금오신화
[기획연재] 꿈꾸다 죽은 늙은이 - 김시습을 찾아서 ⑩ 금오신화
  • 소종섭
  • 승인 2014.09.23 17: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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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최초의 한문소설 를 쓰다
1493년 매월당 김시습은 부여 무량사에서 59세로 생을 마쳤다. 조선 최고의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인 그의 면모는 사상가, 철학가, 종교인, 문학가, 여행가 등 실로 다양하다. 유교에 바탕을 두었으면서도 불문에 귀의에 <십현담요해> <화엄석제> 등 불교와 관련해 많은 수준 높은 저술을 남겼다. 도교에도 정통한 그는 ‘한국 도교의 鼻祖’로 불린다. 전국을 유람하면서 남긴 시가 남아 있는 것만 2,200수가 넘는다.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와 ‘애민의’‘인군의’ 등 많은 수필도 남겼다. 홍유손은 선생을 기리며 쓴 제문에서 ‘기암괴석과 이름난 물은 공께서 감상하신 뒤에야 비로소 빛나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전국 팔도에 선생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김시습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놀고먹는 이들을 경멸하며 노동의 신성함을 예찬했다. 자리만 누리는 권력자들을 조롱하며 “어떻게 저런 인물이 자리를 맡았나” 하고 한탄했다. 역사 속에서 지조와 광기의 천재로 상징화 된 그는 자유인이며 비판자, 동시에 왕도정치가 구현되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꿨던 이상가였다. 선생은 스스로를 ‘夢死老’ 즉, ‘꿈꾸다 죽은 늙은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착안해 <꿈꾸다 죽은 늙은이- 김시습을 찾아서>라는 기획연재의 제목을 따왔다. 과거 속에서 현재를 돌아보는 인문기행이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부탁드린다.

세상에 없던 새로운 책, 진기한 이야기를 찾아 문학사의 금자탑을 쌓다

의 무대 가운데 하나인 전북 남원 만복사 터 21c부여신문

경주에 머물 때만이 아니라 조선 국토를 기행하면서 김시습이 남긴 시문들에는 문화유산이 많이 등장한다. 조선 초기라는 시대적인 시점을 감안할 때 국토를 종주하며 숱한 기록을 남겼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시 그가 보여준 문화유산에 대한 깊은 관심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문화유산은 곧 선조들의 정신이고 문화이다.

매월당 김시습 선생이 문화유산에 대해 보인 관심은 곧 그가 현실의 부조리와 불의를 과거 선조들이 남긴 정신문화 유산을 통해 위로 받고 해결책을 모색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라고 했던가.

가본 이들은 알겠지만 경주 금오산 용장사는 경주에서도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깊은 산 속이다. 이곳은 김시습에게 은둔지이자 자연과 호흡하는 현장이었다. 그는 이곳에 머물며 매화와 대나무를 심고 소나무와 잣나무, 삼나무 등의 절개를 사랑했다.

특히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노래하기 시작한 매화는 선비들의 고결한 정신을 상징하는 상징물이었다. 자의식이 강한 김시습에게 하루하루는 참으로 힘든 고행의 나날이었다. 세상 누구와도 화합할 수 없는 깊은 외로움, 그럼에도 왕도정치가 구현된 세상을 꿈꾸는 높은 이상은 늘 그를 따라다녔다. 스스로의 말대로 그는 ‘꿈꾸다 죽은 늙은이’였다.

의 무대 가운데 하나인 평양 부벽루. 21c부여신문

경주 남산 용장사에 머물 때 그는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금자탑을 세웠다. 바로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은 것이다. 정확치는 않으나 학자들은 그의 나이 30대 중반인 1470년쯤 창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지은 이유와 배경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가 금오신화를 지으면서 쓴 시 ‘금오신화를 짓고(書甲集後)’를 통해 얼추 유추할 수 있다.

작은 집에 자리 까니 따스한데
막 떠오른 달빛에 매화 그림자 창에 가득
등불 켜고 긴 밤을 향 사르며 앉아
세상에 없던 새로운 책을 썼노라.

벼슬할 생각은 이미 접었고
깊은 밤 소나무 창 아래 단정히 앉았네.
향로에 향 꽂고 깨끗한 책상에 앉아
풍류 넘치는 진기한 이야기 골똘히 찾았지.

<금오신화>는 ‘만복사 저포기-저포놀이가 맺어준 사랑’ ‘이생규장전-이생이 엿본 사랑’ ‘남염부주지-염라왕과의 대화’ ‘취유부벽정기-부벽정에서의 짧은 만남’ ‘용궁부연록-물거품처럼 사라진 용궁 잔치’ 등 다섯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 명나라 구우가 쓴 <전등신화>의 영향을 받기는 했으나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바탕으로 하고 다양한 형식을 활용한 독창성이 빛나는 작품이다. 열녀 설화, 저포내기 설화 등 민간에 전승되어 오던 설화를 소재로 쓰고 남원, 송도 등 조선 땅을 배경으로 했으며 시문이나 문답체를 사용하는 등 미학적인 측면에서 도드라진다.

기자헌이 17세기 초에 간행한 에 실려 있는 김시습의 자화상. 21c부여신문

이들 작품 가운데 애정을 다룬 ‘만복사 저포기’ ‘이생규장전’은 <금오신화>에만 실려 있는 것이 아니라 16세기 유학자였던 신독재 김집(1574-1656)의 ‘신독재수택본전기집’에도 실려 있다. 그만큼 이 두 작품이 요즘 말로 치면 상대적으로 베스트셀러였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이 두 편은 일본 아사이 료이(1612-1691)의 ‘오토기보코(1666)’에도 번안되어 실려 있어 우리나라 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인기를 끌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온갖 시련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애정을 성취해 내려는 주인공을 보면서 독자들은 삶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또한 끝내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순수한 사랑을 가로 막는 현실의 높은 벽을 절감하기도 한다. 고독과 슬픔, 좌절과 환멸의 정서는 김시습이 시대에 대해 느꼈던 정서와 다르지 않다.

<금오신화>에 실린 작품들이 김시습의 고독과 쓸쓸함, 분노 등을 투영하고는 있지만 작품 전반이 어둡거나 무거운 것은 아니다. 시문들이 많아 읽기가 편하고 이야기 전개 또한 흥미진진하다. <금오신화>가 지금도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최초의 한문소설이라는 것과 함께 작품 안에 들어 있는 메시지 뿐 아니라 작품 자체가 갖고 있는 완결성과 재미 때문일 것이다.

1884년 일본에서 간행된 표지. 일본에서는 여러 차례 가 간행됐다. 21c부여신문

유교가 지배했던 조선 사회에서 <금오신화>에 나온 귀신 이야기 등은 지배층이 수용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선조 임금의 명으로 간행된 <매월당집> 등에는 김시습이 지은 각종 불교 관련한 글들과 <금오신화>는 실려 있지 않다.

지난 번에 요약해 실은 ‘만복사 저포기’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을 간략히 해설하고 작품 안에 들어 있는 시문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을 발췌했다.

이생규장전

고려 말 송도를 배경으로 남녀 간 만남과 헤어짐을 기본 골격으로 삼고 있는 작품이다. 젊고 아름다운 재사와 미인이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으로 이어지지만 행복은 전쟁으로 인해 무참히 깨진다. 아내와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 남게 된 이생이 귀신으로 나타난 부인 최씨와 다시 만나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주인공 이생이 소극적인 반면, 최씨는 사랑에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생이 달아난 뒤 침입한 홍건적에 맞서는 최씨의 모습은 강한 민족의식과 정절의식을 보여준다. 이것은 김시습의 절의와도 닮은 부분이 있다. 다음은 ‘이생규장전’에 나와 있는 시 가운데 하나이다.

가을 바람 쌀쌀하니 이슬 맺히고
가을 달빛 아름답고 물은 맑고 푸르네.
기러기 한 번 두 번 울며 돌아가고
우물가 오동나무 잎 지는 소리 다시 듣는다.

평상 아래 온갖 벌레 시끄럽게 울고
평상 위 미인은 구슬 같은 눈물 흘리네.
님은 만리 밖 싸움터로 나가 있는데
이 밤 옥문관도 달빛은 밝겠지

작은 못에 연꽃 다 지고 파초도 누렇게 시들어
원앙 무늬 기와에는 갓 내린 서리 엉겨 있네.
묵은 근심 새로운 슬픔 막을 길이 없는데
하물며 귀뚜라미 소리까지 동방에서 들여오는구나.

김시습이 죽은 뒤 50년 쯤 뒤에 윤춘년이 편집한 목판본 시작 부분. 21c부여신문

취유부벽정기

개성 출신의 주인공 홍생이 부벽루에서 기씨녀를 만나 함께 시를 주고 받은 후 돌아와서는 여자를 잊지 못해 병이 들어 따라 죽는다는 내용이다. 홍생은 개성 상인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것은 왕조 교체기에 소외된 고려의 유신들이 상인으로 몸을 숨긴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기씨녀는 위만에게 나라를 잃은 준왕의 딸로 나라가 망한 뒤 자살하려다 선계로 인도되어 항아의 시녀가 된 인물이다. 홍생과 기씨녀는 둘 다 망국의 비애를 경험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단군-기자조선-고구려-고려로 이해하고 있고 단군을 신선으로 묘사하고 있어 주체적 역사관을 보여준다는 특징이 있다. 홍생이 평양을 돌아보며 지은 시가 안에 실려 있다.

대동강 물빛 쪽빛보다 푸르러도
천고 흥망의 한은 견디지 못하리로다
임금님 마시던 우물 말라 넝쿨 가지 드리워 있고
돌로 쌓은 단 이끼 끼고 능수버들 녹나무 에워싸고 있네.
낯선 고을에서 읊조린 풍월 시 천 수에 이르니
옛 서울 생각에 술이 취해 오는구나.
밝은 달 아래 난간에 기대어 잠 못 이루는데
깊은 밤 계수나무 꽃 지는 소리.

홍생이 시를 읊은 것을 들은 기씨녀가 읊은 시 가운데 한 수다.

세월은 나는 새처럼 문득 다 날아가 버리고
세상 일은 달아나는 파도 같아 거듭 놀라네.
이 밤의 정회를 누가 알아주리
안개 낀 넝쿨 사이로 종소리만 들려오네.

남염부주지

유학을 공부한 박생이라는 인물이 꿈에 남염부주를 다녀오는 이야기이다. 현실에서는 과거도 합격 못해 늘 불만을 품고 있던 박생이 염라국에서는 통달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염라왕을 이어 왕이 된다. 겉으로 보기에 무시무시한 곳으로 보이는 염라국 왕은 세상에서 충성을 다한 인물로서 요임금이나 순임금을 본받아 박생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현실로 돌아온 박생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세상을 떠난다. 이 작품은 꿈 속에서 다른 세상을 다녀오는 몽유록 형식을 취하고 있고 문답의 형태로 작품을 구성했다. 문답 내용은 귀신, 정치, 지옥 등 주제도 다양하다. 김시습은 소설의 형식을 빌어 자신의 생각을 담았다.

‘남염부주지’에서는 세조의 왕위찬탈에 대한 김시습의 비판적인 의식도 엿볼 수 있다. 다음과 같은 구절이 대표적이다.

‘나라를 가진 자는 폭력으로 백성을 위협해서는 안 된다. 겉으로는 백성이 비록 두려워하여 명령에 따르는 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반역할 마음을 품어 시간이 흐르면 결국 큰 재앙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덕 있는 자는 힘으로 군주의 자리에 나아가지 않는다. 하늘이 비록 자상한 말로 사람을 깨우치지는 않지만 실제로 보여주는 일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살피면 하늘의 명이 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릇 나라는 백성의 나라요, 명령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다. 천명이 이미 임금에게서 떠나고 민심이 이미 임금에게서 떠나간다면, 비록 몸을 보전하고자 한들 어찌 보존할 수 있겠는가.’

생·사육신 서첩에 실려 있는 김시습의 글씨. 21c부여신문

용궁부연록

문장을 잘하는 선비가 용궁에 가서 글을 써주고 잔치를 즐기고 오는 내용이다. 주인공 한생은 용왕이 원하는 대로 글을 써주고 유쾌한 잔치를 즐긴 뒤에 선물을 받고 돌아온다. ‘용궁부연록’은 <금오신화> 가운데 유일하게 웃음이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한생이 선물을 간직한 채 산으로 들어간 뒤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는 결말은 용궁에서의 즐거운 잔치를 한순간에 쓸쓸한 기억으로 만든다. 작품 속에서 군장(郡長)들이 용왕에게 시를 올리는데 셋째 군장이 올린 시는 이러했다.

용왕님 술에 취해 금 평상에 기대시고
산 노을 피어나니 해 벌써 저무네
멋진 춤 너울너울 비단 소매 휘감기고
맑은 노래 가늘게 들보를 감고 올라가네.
몇 해나 쓸쓸히 분개하며 파도를 뒤집었으랴만
오늘은 함께 즐기며 옥 술잔을 드시라
세월 다 가도 사람들은 알지 못하리라
고금의 세상일 허둥대다 지나가는 것을.

<금오신화>의 고독한 인물들은 김시습 자신을 그대로 투영한 것이다. <금오신화>에서 현존하는 인간 세계는 대단히 부정적이며, 그 속에서의 인간의 삶은 고독과 우수로 점철된 비극적인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김시습은 운명의 횡포 앞에 굴하지 않는 인간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묘사했다.

[참고] <김시습 평전> 심경호
<김시습과 떠나는 조선시대 국토기행> 김재웅
<매월당 김시습> 이문구
<매월당 김시습> 이종호
<길 위의 노래> 정길수 편역
<금오신화> 김경미 옮김

d 21c부여신문

소 종 섭
외산 출생, 부여고-고려대 졸업
전) 시사저널 편집국장
현)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회장
현) 인포마스터 사회적전략센터장
저서 <백제의 혼 부여의 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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