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부여’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패망한 백제의 마지막 수도’ 또는 백제가 신라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멸망할 때 삼천궁녀가 절개를 지키기 위해 낙화암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낙화암’을 처음으로 연상한다. 낙화암은 한마디로 부여를 대표하는 중요 아이콘인 것이다.
낙화암은 삼국유사(1281년)에 ‘타사암’이라 기록이 되어있고, 1349년 고려말 가정 이곡이 쓴 기행문 ‘주행기’에는 처음으로 ‘낙화암’이라는 명칭과 유래가 보인다.
그리고 1654년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1607~1689)의 형인 송시묵(宋時默·1605~1672)이 1년간 부여 현감을 지내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부여에 있게 된다. 아마도 이때 우암이 낙화암, 자온대, 조룡대 등의 글씨를 써서 바위 절벽에 새기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이렇게 바위에 새겨진 글씨가 세월에 빛이 바래 이를 잘 보이게 하려고 근자에 붉은색 페인트로 덧칠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덧칠할 때 붉은색 페인트가 글자 획 밖으로 삐져 나와 있거나, 페인트가 튀겨져 있는 등 지켜보는 이들로 하여금 말을 잇지 못하게 하는 상황이 벌어져 있다.
그러나 아무도 이를 지적하거나 고치려는 노력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에 사진을 첨부한다. 담당 부처에서 빠른 시일 내 조치하여 부여 이미지와 우암의 명예가 더 이상 실추되지 않고 ‘명품 부여’로 되살아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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