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박인계(朴仁桂) 원사가 왜구와 싸우다가 전사를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육도순찰사(六道巡察使)로 당당하였던 최영(崔瑩) 장군이 왕에게 왜구토벌을 자진하여 나가 싸우겠다고 진언을 올렸다.
왕은 군사훈련도 안된 60세의 늙음을 염려하며 출정을 만류하였으나 최영 장군은 “지금 왜구의 뿌리를 잡아야 한다”고 재삼 간청을 하자 결국 왕은 장군의 애국충정에 감복하고 출정을 윤허했다.
장군이 밤새워 적진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 왜구는 강물을 건너 부여 홍산까지 쳐들어와 주민들을 살육하고 약탈하며 불을 질르는 만행을 거듭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나서 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최영 장군은 최공철, 강영, 박수연 등과 함께 태봉산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때 수백 여명의 왜구들이 홍산벌에 몰려들었고 적세에 눌린 군사들은 최영 장군의 공격 명령에도 겁을 먹고 싸움을 피했다.
그러자 장군이 앞서 적진에 뛰어들어 돌진하다 왜구가 쏜 화살이 장군의 입술에 꽃혔다. 그러나 장군은 화살을 뽑지 않고 피를 흘리며 계속 달려가 자신에게 화살을 쏜 왜구를 죽인 후에야 화살을 뽑았다. 성난 황소같이 덤벼드는 장군의 용맹을 바라본 군사들은 그때서야 사기를 충전하고 적군에 뛰어들었다. 이내 적군은 풍비박살 되어 서천으로 줄행랑을 쳤다.
왜구의 대첩에 성공한 사실을 박승길 판서가 왕에게 고하자 왕은 어의 전백평을 보내어 상처를 치료하게 했다. 장군이 개경(開京)에 개선을 하자 왕은 조서(詔書)를 맞이하는 의식으로 환영을 해주고 그 전공에 벼슬을 내리려 했다. 그때 장군은 “왜구를 섬멸하기 전에는 어떠한 벼슬도 사양한다”고 하여 철원부원군에 봉하였다고 한다.
이후 왜구들이 최영 장군을 제일 무서운 장군이며, 백수 최만호(白首 崔萬戶)라고 하면서 두려워 했다. 그리고 왕은 홍산의 왜구대첩 파진도(破陳圖)를 그리도록 하였다.
그후로부터 652년만인 1979년에 이르러 부여군수 정연달(鄭然達)이 늦은 감이 있으나 우리고장에 왜구를 물리친 이곳 홍산초등학교 뒤 태봉산(胎封山) 위에 대첩비를 세웠다. 부여군 내에서는 고려때 왜구의 대첩지와 외산 만수산의 태조암 조선개국의 유적이 전해지고 있어 백제문화 유적에 이어 역사적인 유적의 고장으로 내외국인의 탐방객들이 찾아오는 백제의 도읍지이다.
![]() 三享 이 존 길 부여군재향경우회원 |
저작권자 © e부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