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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행 - 윤재환의 부여답사기] 백마강 선상답사-(2)
[연재기행 - 윤재환의 부여답사기] 백마강 선상답사-(2)
  • 윤재환
  • 승인 2014.11.05 09: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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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6시 기상과 함께 다리를 절면서 약간의 산책을 했으나 밤새 먹은 술 때문인지 호박 썰어 넣은 된장국만 한 그릇 비우고 7시 20분경 버스는 부여를 향해 출발하기 시작했다. 부여에서 안내 자료를 200세트 준비한 군청에 근무하는 친구 길채, 영신이, 대원이, 충학이는 비가 오고 있다고 걱정을 하며 전화가 왔으나 비 하고 상관없이 행사는 진행되므로 걱정말고 기다리라는 얘기를 했다.

공주의 금강대교를 들어서면서 부여 답사를 위한 사전 안내를 버스를 함께 타고 계신(서울민학회) 분들께 말씀을 몇 마디 못 드렸는데 버스는 벌써 구드래 나루에 들어서고 있어 배를 타고 추가적인 말씀을 드리기로 하고 선착장에 도착했다. 굵은 장마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런 와중에 한 쪽에선 짐을 나르고, 한 쪽에선 뱃길의 평안을 비는 굿판이 벌어지고, 비를 맞으며 모두의 얼굴에는 한가득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부여의 구드래는(백제시대부터 선착장이었음) 유람선이 부소산의 낙화암을 거쳐 규암의 수북정까지 정규 관광 운항을 하고 있었다. 강물이 많을 경우 45명 정원을 다 싣고 운항을 하지만 강물이 적을 경우는 배 밑면이 강바닥에 닿아 운항을 할 수 없어 승선 인원을 줄여서 운항을 하고 있다.

민학회가 7월 중순으로 일정을 잡은 것도 장마 중이라 강물이 불어 승선 인원을 최대한으로 하여 버스 한 대당 배 한척이 가능하게 하려는 계산이었으나, 쌓인 모래가 워낙 많았고 장항 하구언에서는 비가 계속 내려 물을 계속 방류해 수위가 낮아 도저히 배 한척당 35명 이상은 태울 수 없다하여 180여 전국 민학회원들은 다섯 척의 배로 나누어 탔다.

나는 1982년 여름 故 연재 홍사준 선생의 아들인 홍재선 선생의 안내로 배를 타고 구드래에서 장항을 지나 비인만까지 갔던 이후 20년 만에 안내를 받으며 탐사하던 입장에서 안내를 하는 입장으로 바뀌어 배에 오르니 ‘잘 말씀 드릴 수 있을까’ 하는 마음도 들고 감회가 복잡했다.

한반도 정통성의 무대는 경주에서 고려시대의 개성 그리고 조선시대의 한양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역사의 정통성 무대에서 일찍이 사라져간 백제의 수도 부여! 이곳은 삼국 중 문화가 가장 앞서긴 했지만 나당연합군에 의해 패망한 국가의 수도이기 때문에 백제가 패하면서 모든 것이 철저하게 파괴된 곳이다.

따라서 이 곳은 역사의 정통성 무대인 경주처럼 잘 보존된 문화 유적이 거의 없으므로 진짜 부여를 보려면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펼친 상태에서 시간을 들여 음미를 하면서 보아야만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흔히들 역사는 승자의 논리라고 한다. 즉 힘이 정의가 되는 것이 역사 논리인 것이다. 승리를 하고 나면 승자는 정당성(명분)을 얻기 위해 패자의 모든 것을 승자의 논리에 맞게 왜곡을 하게 된다. 이미 사라져 버린 패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감회도 잠시 배가 운항이 되면서 우선 눈에 보이는 부소산 삼천궁녀의 애절한 사연이 깃든 낙화암(절벽의 붉은 글씨는 우암 송시열 글씨), 백화정, 일년에 잎사귀 뒷면에 홀씨 주머니 하나씩 생기는 고란초와 약수가 유명한 고란사, 소정방이 용을 낚았다는 전설과 소정방 발자국이 남겨져 있다는 전설의 조룡대를 지나 맞은 편의 호암사지 천정대(백제시대 최초의 민주주의 선거 제도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곳), 백제 전성기때 완공한 백제 최대의 사찰인 왕흥사지, 내려오면서 우측의 떠내려온 산 부산과 백강 이경여 선생이 북벌에 대한 상소에 대한 효종으로부터 받은 비답인 ‘지통재심일모도원’(글씨는 우암 송시열 글씨)의 대재각, 백강 이경여 선생이 중국 사신을 다녀오면서 가져다 심어 놓은 백강의 동매, 규암의 수북정, 스스로 데워지는 바위라하여 명명된 자온대(절벽의 붉은 글씨는 우암 송시열 글씨), 조금 지나 부여 경치를 가장 잘 볼 수 있었다는 강 위에 불쑥 솟은 장암면 정암리의 맞바위, 이문학회 김영복이형이 탑 모습이 길죽하여 모딜리아니탑으로 명명한 장하리 삼층석탑과 이 탑이 장마로 무너지는 바람에 발견된 사리장신구 등이 부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는 얘기, 조금지나 제2의 낙화암이라는 이설이 있는 옻배, 그 옆의 임강사지, 전우치 전설이 있는 파진산, 석성산성을 지나 강폭이 현저히 넓어지면서 소정방과 김유신의 나당 연합군이 백제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반조원리, 이곳에 배를 대고 백제가 패망하면서 백제 유민들에의해 구전으로 전해지던 산유화가를 기능 전수자와 함께 막걸리 한 잔과 어우러진 몇 토막을 감상하고 다시 승선을 하였다.

반조원리는 조선 순조 때 이조참의·예조판서·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한 윤광안(尹光顔, 1757∼1815) 선생이 지은 삼의당(三宜堂)이 1909년 화재로 현재 주춧돌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12시 30분경 논산시 강경읍과 방울토마토 주산지인 부여읍 세도면을 잇는 황산대교 못미처 강경의 황산옥 앞에 배를 대고 점심은 황복 매운탕으로 했으나 황산옥을 3층짜리 건물로 새로 짓는 바람에 주변 경관을 완전히 버려놓은 것 같아 씁쓸한 마음에 못내 아쉬움을 뒤로하고 돌아섰다.

배 안에서의 흥겨운 노랫가락을 잠시 주고 받는 중에 양화면 입포(갓개) 밑의 백제 멸망 당시 백제 유민 1만2천여명이 당나라로 붙들려 갈때 아녀자들이 모여 잠시만이라도 머물다가라고 했으나 그냥 지나쳐 아직도 매년 8월 17일이면 근동의 아낙들이 음식을 해와 모여서 그때의 향수를 되 뇌인다는 유왕산에 들러 설명을 듣고 다시 승선하여 새로 완공된 웅포대교 옆 나루에 어렵사리 도착했다.

미리 준비된 맥주 한 잔과 만선을 하고 돌아와 주민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배치기’ 놀이를 끝으로 오후 5시 30분경 1박 2일간 전국에서 모인 민학꾼들의 금강 천리길 부여에서 군산까지 선상답사를 무사히 마치게 되었다. 경험을 함께한 모든 분들께 그저 머리 숙여 감사를 올릴 뿐이다.

ㅠ 21c부여신문

윤 재 환
신 부여팔경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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