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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일기] 재영아! 우리는 어떤 인연으로 만났을까?
[교육일기] 재영아! 우리는 어떤 인연으로 만났을까?
  • 배철식
  • 승인 2014.11.11 16: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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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의 연어를 읽고...
재영아!

작년에 너를 처음 보았을 때, 너의 맑은 눈이 참 예뻤단다. 아침이슬로 묻어나는 들꽃 향기처럼 넌 그렇게 내게 왔었어. 우리 반이 아니었기에, 아주 가끔 너의 빈자리에 창문 틈으로 햇살만 가득 내려앉을 때 궁금한 마음에 물어보았지. 담임선생님을 통해 너의 맑은 눈이 왜 가끔 먼 산으로 향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단다. 엄마의 부재보다 어쩜 더 너를 힘들게 했던 것은 마음을 같이 하지 못하는 아빠와의 관계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3학년 3반 너는 우리 반으로 왔어. 나는 너의 담임으로 소중한 관계를 맺었지.

작년이었다. 몇 년 전 글틀녘 동아리 학생들과 문학기행 준비를 하며 나는 소중한 인연을 만들었단다. 고창 선운사를 지나 미당 서정주 생가와 문학관, 그리고 지인의 소개로 연을 맺게 된 안도현님과의 만남이었다. 문학기행을 준비하며 작가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기 위해 나는 안도현님이 쓴 책을 거의 읽었다.(물론 읽었던 책도 있었지만 말이다)‘아침엽서, 그리운 여우, 연어, 짜장면, 관계, 서울로 가는 전봉준’ 등 등

그런데 재영아!

열 권 가까이 되는 책이 다 좋았지만, 선생님은 ‘그리운 여우’에 실린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와 ‘관계’라는 자전적 수필에 가까운 동화가 내내 가슴을 울렸단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단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너에게 묻는다-전문->

재영아!

3월, 새학년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너의 무단결석이 잦아졌고, 나는 조급한 마음에 버럭 화를 내기도 하고, 상담실로 불러 제법 너를 위로하는 말들을 쏟아냈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았단다. 꼭 담은 너의 입술을 보면서도 나는 담임으로써 이 정도 했으면 되었겠지 하며 너와의 간격을 좁혀나갔다 확인하고 싶었어. 하지만 너의 무단결석은 그 후에도 계속 되었지.

자율학습시간이었던가? 공부하는 너희들을 앞에 두고 내가 다시 꺼낸 책이 ‘관계’였다.‘서로 이름을 안다는 것, 그것은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지요. 그렇게 관계를 맺고 나면 서로 함부로 대하지 못한답니다.’ -‘내 마음의 자작나무’에서-
‘관심, 그것이 사랑의 시작이었네.’ -‘버들치를 기르는 시인’에서-

재영아!

작년, 따가운 햇살을 뚫고 찾아간 전주 우석대에서 안도현님은 사랑을 말했다. 사람과 사물, 아니 세상 모든 것과의 사랑이 창작의 힘이 되었다고 했다. 그물코같이 촘촘한 관계 때문에 이 세상은 따뜻하고 그래서 작가는 따뜻함의 편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자율학습 두 시간 동안 ‘관계’라는 책을 읽었고 온통 내 생각은 재영이 너에게로 갔다. 그 날 너와 나는 교실에 앉아 어두워지는 산그림자를 보았지.‘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할 수 없고, 밤늦게 과음에 지쳐 돌아오는 아버지 뒤로 싸늘한 정적이 몇 년 째 계속된다고, 아무도 자기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리고 너는 어두워지는 창가에 앉아 노을을 바라 보았지. 너와 나의 거리가 좁혀졌다는 생각에 교무실에 돌아와 한참이나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가슴으로 전하지 못하고 머리로만 다가서려 했던 내가 그 날 저녁 너무 많이 미웠고, 늦게나마 작은 깨달음으로 너의 속내를 엿볼 수 있다는 행복에 밤하늘 별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재영아!

너를 이해하기 위해 이른 밤 찾았던 선술집. 아버님은 쓴 소주로 세월을 달래고 계셨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됐는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딱히 변명이 궁색한 아버님. 아버님께서는 선생님 앞에서 고개를 떨구셨고, 네 앞에서는 영원한 죄인이라 하셨다. 너무 미안하다고... 돌이키고 싶다고... 네가 아버지를 이해하라고 하기에는 선생님의 말에 설득력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하늘이 맺어준 관계! 너는 아버지의 아들이다.

재영아!

어제 아침에는 네가 가방을 메고 학교에 왔더구나. 지금까지 너는 등교를 할 때도 집에 갈 때도 가방이 없었는데... 그 가방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하지만 묻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아름다운 관계’를 맺었으니까. 그 가방 속에 사랑 한 줌씩 넣어 가면 좋겠다라는 내 생각 뿐....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연탄 한 장 2연>

재영아!

세상에 대한 눈을 조금 더 따뜻한 시선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길가에 핀 노란 민들레꽃 하나가 얼마나 우리에게 소중한 인연인지를 알고 있다. 처음 너를 보았을 때, 그 맑았던 눈을 기억한다. 될 수만 있다면 오랫동안 식지 않는 연탄 한 장이 되었음 싶다.

세상과 정말 아름다운 관계를 촘촘히 엮어보자.

ㅇ 21c부여신문

배 철 식
백제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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