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해는 저무는데 갈 길은 멀다(日暮途遠)-1
[특별기고] 해는 저무는데 갈 길은 멀다(日暮途遠)-1
  • 김진환
  • 승인 2015.01.21 09: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백제의 고도 부여 사비성의 낙화암이 있는 백마강 맞은 쪽 서편에 부산(浮山)이라는 산이 우뚝 서있다. 옛 전설에 이 산이 청주에서 떠내려 온 ‘뜬 산’이라고 했으며, 神이 살고 있다고도 알려져 있다.

푸른 비단강(錦江)을 내려다 보는 이 산 기슭에는 대재각(大哉閣)이라는 전각이 있다. 안에는 큰 자연석 바위에 “마음에 지극한 아픔이 있지만, 해는 저무는데 갈 길은 멀구나”(至痛在心 日暮途遠)라는 여덟 자를 뚜렷이 파놓은 각서석(刻書石)이 안치되어 있다.

효종대왕(재위 : 1649∼1659)의 뜨거운 북벌 의지가 담겨 있는 역사적인 유적이다. 효종때 영의정인 백강 이경여(李敬輿, 1585∼1657)가 73세로 타계하기 3개월 전 임금에게 올린 상소에 대해 효종이 ‘성이지통재심 유일모도원의’(誠以至痛在心, 有日暮途遠意 : 경의 뜻이 타당하고 마음이 아프지만, 뜻을 이루는 길이 아직 멀다)는 비답을 내렸다.

같은 배청 북벌파인 우암 송시열이 그 중 핵심인 8자를 직접 써서 백강의 셋째 아들 이민서(대제학, 이조판서)에게 전한 것을 1700년(숙종 26년) 손자인 이이명(우의정, 좌의정)이 할아버지 백강이 살던 마을 뒷산 바위에 새긴 것이다. 이를 보존하기 위해 전각을 짓고 ‘상서(尙書)’의 대재왕언(大哉王言, 크도다, 왕의 말씀이여)에서 이름을 따 대재각이라고 하였다.

백강 이경여는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에 피난하였다. 결국 인조가 성에서 내려와 삼전도에서 여진 오랑캐 청에게 굴복하는 치욕을 당하는 아픔을 겪었고, 효종(봉림대군)은 형 소현세자, 아우 인평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백강은 경상관찰사, 이조참판을 거쳐 형조판서가 되었는데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는 배청파(排淸派)의 주모자라는 이유로 1642년 청나라 심양에 잡혀가 억류되어 있다가 이듬해 소현세자, 척화파 김상헌과 함께 귀국하였다. 백강은 대사헌을 거쳐 우의정이 되었는데 1644년 청나라에 사은사로 갔다가 다시 억류되어 다음 해 풀려났다.

봉림대군은 1645년 소현세자가 죽자 돌아와 세자로 책봉되고 1649년 인조가 죽자 31세의 나이로 조선 제17대왕 효종이 되었다.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머물면서 서쪽으로는 몽고, 남쪽으로 산하이관(山海關), 동쪽으로 철령위, 개원위 등으로 끌려 다니면서 명의 패망을 직접 목격하는 등 온갖 고초를 겪어 청나라에 대한 반감과 북벌의 의지를 다지게 되었다.

그는 왕에 즉위하자 이경여, 김집(김상헌의 추천), 송시열, 송준길 등 배청 북벌파를 기용하고 이완, 유혁연, 원두표 등 무장을 중용하여 치욕을 북벌로 갚자는 북벌설치(北伐雪恥)를 위한 군비 확충에 나서게 되었다.

1652년에는 북벌의 선봉부대인 어영청을 대폭 개편, 강화하고 임금의 호위를 맡은 금군을 기병화 하였으며, 1655년 금군의 수를 1천명으로 증강시켜 왕권을 강화하였다. 또한, 남한산성을 근거지로 하는 수어청을 재강화하여 한성외곽의 방비를 보강하는 한편, 강화도 군사력을 증강시켜 수도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이어 지방군의 핵심인 속오군(束伍軍)의 훈련을 강화하기 위하여 이를 지휘할 영장제(營將制)를 내실화 하고 속오군에 정예인력을 보충하였다.

당시 나선군(러시아군대)이 흑룡강, 송화강 유역에서 코자크족을 앞세워 담비 모피 노략질을 일삼아 1652년 청나라가 그들을 축출하게 하였지만 나선군의 총포에 번번히 당하자 탁월한 사격술을 가진 조선 조총군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패전국의 설움이랄까? 1654년 북벌을 위해 준비해온 조선 조총군 100명이 청의 요구에 따라 1차 나선군 정벌에 나서 승리하였으며, 신유가 이끄는 조선 조총군 200명이 2차 정벌에 나서 나선군을 섬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또한 네덜란드인 하멜이 표류해 오자 그를 훈련도감에 수용하여 조총, 화포 등 신무기를 개량, 보충하게 하고 필요한 화약생산을 위해 염초생산에 매진하였다.

효종 10년(1659년) 3월 왕은 다른 사람을 물리치고 송시열과 독대를 하면서 자신의 북벌계획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오랑캐의 일은 내가 잘 알고 있다. 정예화한 포병(砲兵) 10만을 길러 자식처럼 사랑하고 위무하여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는 용감한 병사로 만든 다음, 기회를 봐서 오랑캐가 예기치 못할 때 곧장 관(關)으로 쳐들어 갈 계획이다. 그러면 중원의 의사(義士) 호걸 중에 어찌 호응할 자가 없겠는가?”

그러나 하늘의 뜻을 어찌할 것인가? 2개월 뒤인 그해 5월 효종이 귀밑의 종기를 치료한다고 침을 맞고 갑자기 승하하는 바람에 북벌의 꿈은 동력을 잃게 되었다. 더욱이 당시 국가재정이 튼튼하지 않아 양병(養兵)보다 양민(養民)이 더 시급하다는 반대의견이 점차 더 힘을 얻게 되었다.

ㄴ 21c부여신문

김 진 환
재경부여군민회장
법무법인 충정 대표변호사
법학박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