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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해는 저무는데 갈 길은 멀다(日暮途遠)-2
[특별기고] 해는 저무는데 갈 길은 멀다(日暮途遠)-2
  • 김진환
  • 승인 2015.02.10 17: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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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중에는 송시열 등이 북벌을 주장하면서도 속으로는 민생을 빌미로 북벌추진에 소극적이었다고 주장하거나 북벌은 가당치 않은 꿈인 것처럼 주장하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자조적이거나 편향된 시각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진족 오랑캐는 늘 우리 국경 북쪽에서 준동하여 우리가 여러차례 정벌하였던 대상이었고, 청나라가 중원을 장악하였지만 아직 명나라의 잔존세력이 남아있어 기회를 엿보아 청과 일전을 앞두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더구나, 일국의 왕자로서 10년간 적국에서 볼모로 치욕을 당한 효종의 입장에서는 오랑캐에게 세 차례 큰절을 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으며 항복한 선왕의 치욕을 되갚고 좌절감에 빠져 상처받은 국민의 자부심을 회복하기 위하여 북벌을 계획하는 것은 조선 임금이 꼭 추진해야할 과제이고 시대적 소명이었다고 생각된다. 왜 효종의 생각과 의지가 무모하다고만 치부하는가?

효종이 구상했던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효종의 아들인 현종 재위말부터 손자인 숙종 즉위초까지 청나라에서는 「삼번의 난」이라고 불리우는 내전이 발생하였다. 청나라 남부에서 명나라 출신의 자치국 번왕 오삼계가 난을 일으키고 다른 두 번(藩)에서 가세한 소요가 일어나자 백호 윤휴(尹鑴)가 밀소를 올려 북벌을 주장하였다.

“우리나라 정병(精兵)과 뛰어난 활솜씨는 천하에 이름이 있는데다 화포와 비환(飛丸 : 조총)을 곁들이면 진격하기가 충분합니다. 군졸 1만대(隊)를 뽑아 북쪽의 수도 연산(燕山 : 북경)으로 넓은 규모로 나아가 그 등을 치고 목을 조이는 한편, 바다 한쪽 길을 터 대만에서 반청운동을 하는 정성공(鄭成功) 세력과 힘을 합해 그 중심부를 흔들어야 합니다. 동시에 중국의 북부와 남부, 일본에도 격문을 전하고 서촉까지 알려서 함께 떨쳐 일어나게 한다면 천하의 충의로운 기운을 격동시킬 수 있습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오랫동안 북벌의 꿈을 꾸어온 윤휴는 청나라의 정세변화를 천재일우의 기회로 판단하였지만, 그 밀소에 대하여 현종은 응답을 하지 않았고, 숙종 즉위년(1674년), 윤휴가 다시 북벌계책을 담은 밀봉한 책자를 올려 다음해 경연에서 논의 되었는데 15세의 숙종은 두손을 모으고 듣기만 하였다고 한다.

윤휴는 “우리나라에 10만 정병이 있고 식량도 쉽게 장만할 수 있으므로 열흘이 못되어 심양을 차지할 수 있고, 심양을 빼앗고 나면 관내(關內)가 진동할 것이니 일이 이루어 지지않을 염려가 없다”고 믿었다.

윤휴는 군비확충을 위하여 특정 토지에 대한 세금 면제를 없애고 양반 상인을 불문하고 모든 집에 군포를 부담시키는 호포제를 주장하는 한편, 일종의 전차인 병거(兵車) 등 제작에도 앞장섰다. 그 뒤에도 뜻 있는 지사들로부터 윤휴의 주장과 뜻을 같이 하는 북벌의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고 숙종실록이 전하고 있다.

주자학에 찌든 무리들이 현실성이 없는 말이라고 일축하였지만 그들의 주장과 실행방안은 대의(大義)와 애국심, 충성심으로 가득찬 것이었다. 효종이 살아 있더라면 어떠했을까 궁금하다.

병자호란 후 사실상 ‘적국’으로 설정되어 1세기 이상 은밀히 극복의 대상이었던 청에게 복수하고 치욕을 씻는 천하의 대의를 누가 옳지 않다고 하겠는가? 다만, 당시 정치지도자들이 국가가 전쟁을 감당할만한 재정능력이 취약한데다가 곤궁한 백성의 민생을 걱정한 나머지 절체절명의 국가 위기를 불러올 수 있는 이 문제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청나라의 세력이 점차 커지고 예상과 달리 군사대국을 넘어 문화대국으로 부상하게 됨에 따라 정조시대에 이르러 집권층 젊은이를 중심으로 북벌의 이상론을 버리고 청을 배워야한다는 북학(北學)의 현실론이 대두된 것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대세였다고 생각된다.

역사는 때론 사람들의 의지와 달리 흘러간다. 북벌계획도 그러했다. 그러나 효종이 품은 뜻은 웅대했고 그 뜻을 헤아린 백강 이경여의 충심은 바위에 새겨져 30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변함이 없다.

백강은 세종대왕의 아들 밀성군의 6대손이고 원래 포천 태생이나 부여 백강마을(지금의 부여 규암면 진변리)에 세거하면서 공무 틈틈이 자녀들을 훌륭하게 훈육하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였다.

백강은 자녀들이 경계하고 행할 내용을 가르치기 위해 글을 남겼는데, 백강이 작고한 후 2년 뒤인 1659년 후손이 그 글을 집안에 길이 남기기 위해 작은 칼에 새겨 넣은 것이 「백강공 수잠 장도명」(白江公 手箴 粧刀銘)이다.

그 요지를 소개하면 ①어버이에게 문안부터 하라 ②마음을 가다듬어라 ③외우고 깊이 생각하라 ④몸을 낮추고 배움을 행동으로 옮겨라 ⑤사리사욕을 경계하라 ⑥행동을 신중히 하라 ⑦질문을 하라 ⑧적게 먹어라 ⑨사치와 화려함을 멀리하라 ⑩여자를 멀리하라 ⑪하루에 세 번 반성하라 ⑫이로움이 아니라 의로움을 따르라 등이다.

여기서 자세한 설명을 덧붙일 여유가 없지만, 백강의 교육철학은 후세에 꽃이 피어 그 자손은 5명의 정승과 9명의 판서를 비롯하여 수십명이 당상관에 올랐다.
특히, 학식과 덕망의 상징인 대제학(文衡)을 3대(이민서- 손자 이관명 - 증손자 이휘지)에 걸쳐 배출하여 그의 집안이 조선 4대 명문가(전주이씨 백강 이경여 가문 외에, 광산김씨 사계 김장생 가문, 연안이씨 월사 이정구 가문, 달성서씨 약봉 서성가문)로 꼽히게 되었다.

지금도 백강의 가족이 살던 부여 부산(浮山) 기슭에는 영의정 이경여와 신독재 김집(부여현감, 이조판서, 좌찬성)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창건된 부산서원(浮山書院)이 세워져 있고, 그 앞에는 백강이 중국에서 억류되었다가 돌아오면서 가져다 심었다는 동매(冬梅, 雪中梅)가 한겨울이면 흰 꽃을 피워 향기를 풍긴다.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고향이 부여인 필자는 백강마을의 역사성과 부여 동매의 흰 꽃 향기에 이끌려 지난 여름 백강마을에 작은 전원주택을 마련하게 되었다. 백강이 살았던 곳의 인근이라서 그런지 집 뒤에는 푸른 대나무가 무성하다.

바람이 불 때면 청초한 댓잎들이 백강과 그 자손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려주는 듯하다.

ㅇ 21c부여신문

김 진 환
재경부여군민회장
법무법인 충정 대표변호사
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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