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4 21:55 (수)
[탐사기획] 시남(市南) 유계(兪棨)
[탐사기획] 시남(市南) 유계(兪棨)
  • 소종섭
  • 승인 2012.03.29 12: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 기행 [15]
부여는 역사와 문화, 정신의 고장이다. ‘패망한 나라 백제’의 쓸쓸함에 대하여 말하는 이들이 있으나 백제의 마지막은 비장했다. 멸망 이후의 항전 또한 치열했다. 반면 신라는 어떠했나.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나라를 스스로 고려에 바쳤다. 고려는 이성계의 쿠데타로 뒤집어졌다. 조선은 매국노들의 협력 속에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낙화암은 ‘패배’와 ‘비참함’의 상징이 아니다. 승자들의 역사 속에 그렇게 기록되었을 뿐이다. 낙화암은 차라리 목숨을 던질지언정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자존심’과 ‘항전’의 상징이다. 부여에는 낙화암처럼 잘 알려진 곳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알아야 할’‘새로이 의미를 부여할 만한’ 인물과 유적들이 많다.

우리는 성충, 흥수, 계백과 낙화암, 부소산, 궁남지, 정림사지 5층 석탑 등으로 상징되는 사비 백제 시대의 인물과 문화 유적에 대해 친숙한 편이다. 그러나 ‘백제’만이 부여의 전부는 아니다. 고려·조선 시대 그리고 그 이후에도 부여와 관련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은 때로는 서원에, 때로는 묘소에, 때로는 사찰에, 때로는 유적 없이 역사 속에 이름을 남겼다. 이제 이들을 재조명 해 그분들의 뜻과 정신을 되새길 때가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부여 정신’을 찾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격주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들’을 연재하는 이유이다.

부여에 살아 있는 조선 유학의 정신
김장생의 제자로 송시열 등과 더불어 충청도의 유림 5현(五賢) 가운데 한 명


임천면 칠산리에 있는 칠산서원 전경. 조선 중기 대학자였던 시남 유계 선생을 모신 곳이다. 21c부여신문

부여군 임천면 칠산리 384번지. 칠산서원(七山書院)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조선 중기 인물로 조선 예학의 대가로 불렸던 시남(市南) 유계(兪棨) 선생이 모셔져 있다. 선생은 선조 40년(1607년)에 태어나 현종 5년(1664년)에 세상을 떠났다. 자 무중(武仲), 호 시남(市南),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기계 유씨이다. 참봉 양증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의령 남씨로 병조참판 이신의 딸이다.

그는 사계 김장생으로부터 성리학을 배웠으며 예학과 역사학에 정통한 유명한 학자였다.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이유태 등과 더불어 충청도 유림의 5현(五賢) 가운데 한 명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호서 사림 간의 갈등으로 분열하려는 조짐 속에서 중간 위치에 있으면서 불편부당한 위치에서 생을 마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칠산서원은 한마디로 부여에 살아 있는 조선 유학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부여 출신이 아닌 선생을 모신 서원이 임천에 창건된 이유는 무엇일까.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시강원 설서(說書)로 있던 그는 청나라와의 화의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척화파 입장에 섰다. 그러나 결국 인조 임금이 삼전도에서 머리를 땅바닥에 세 번 부딪히는 굴욕을 당하며 청나라에 항복하자 그는 이른바 ‘척화죄’로 유배길에 오른다. 이때 그의 유배지가 바로 임천이었다. 그는 4년 동안 임천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성리학 공부에 전념했다. 이것이 선생과 부여의 인연이었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20여 년이 지난 1686년(숙종 12년) 부여 지역 유림들이 유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을 건립했다. 1696년(숙종 22년) 선생은 좌찬성으로 추증되었고, 1697년 대신들이 경연에서 서원에 사액을 내려 줄 것을 청해 숙종 임금이 지명에 맞춰 ‘칠산’이라는 사액을 내렸다. 칠산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칠산리 와종부락에 다시 세워진 뒤 1966년 지역 유림과 후손들에 의해 현재 위치로 옮겼다.

선생은 인조 8년(1630년) 진사과에 합격하고 3년 뒤 식년문과 을과에 급제해 승문원(외교에 대한 문서를 맡아보던 관청) 관리로 벼슬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를 전후해 그는 학문의 동지들을 만난다. 그가 사계 김장생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627년 21세 되던 해로 사계에게 ‘상변지간(常變之間)에 예를 어떻게 행할 것인지’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이것이 기록에 남아 있는 유일한 사계 선생과의 만남이고 그가 사계의 문하로 분류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ㄱㄱ 21c부여신문

사계 선생의 둘째 아들인 신독재 김집(1574년~1656년·인조반정 뒤 처음 나간 관직이 부여현감이었다. 치세를 잘해 칭송이 자자했다. 백강 이경여 선생과 함께 규암 진변리에 있는 부산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것은 그가 임천에 유배되던 전후로 보인다. 이러한 인연으로 유계는 김장생-김집의 문인 집단과 정치적인 운명을 함께 하게 된다. 벼슬길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그를 옹호한 것은 이들 호서의 사림들이었고 유계 역시 산족(山足)이라는 이름을 얻었을 정도로 호서 사림 세력의 중심 역할을 했다.

유계는 또 김육을 도와 대동법을 확장하는데 기여했고 좌의정·우의정을 역임한 포저 조익의 문인이기도 하다. 조익은 선생이 임천 유배에서 풀려났을 때 그를 천거하면서 “유계는 포의(벼슬이 없는 선비를 일컫는다)일 때 신에게 경서를 배워서 신은 그의 위인이 범연치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와서 보니 참으로 정직한 선비입니다”라고 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다 전쟁이 끝난 뒤 임천으로 유배된 그는 1639년까지 유배 생활을 한다. 유배 중이던 1638년(인조 16년) 그의 나이 32세 때 <家禮集解(가례집해)>를 찬술했는데 이것은 몇 년 뒤 본격화하는 가례원류 편찬의 바탕이 된다. 임천에서 그가 어디에 은거했으며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으나 학문적 열정이나 인근 파평 윤씨 가문과의 밀접한 관계 등에서 짐작컨대 학문을 닦고 가르치고 토론하며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ㅇㅇ 21c부여신문

유배에서 풀려난 그는 벼슬길에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부여 인근 금산으로 간다. 1641년 금산 마하산 아래 남일면 대보촌으로 가 서실을 짓고 ‘산천재(山泉齋)’라고 편액을 썼다. 그는 ‘산천재(山泉齋)’라는 이름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어린 것은 만물의 싹이니 성인이 만물의 싹을 기르지 않을 수 없다. 童蒙(동몽·남자 아이)이 내게서 구하는 것은 군자가 덕을 기르도록 수행하는 것이고 어린이를 바르게 키우도록 하는 것이다. 산 밑에서 샘이 나온다고 했으니 (산천재는)동몽을 위하여 만들었다.’

유계 선생이 학문적으로 가장 성숙하고 호서 사림들과 유대를 깊게 맺었던 때가 이때였다. 호서 사림의 거물인 송시열, 송준길을 비롯해 금산에 살고 있던 초려 이유태, 윤선거, 윤문거 등이 모두 연배가 비슷했다. 특히, 명재 윤증의 부친 윤선거와 선생은 동문수학한 사이를 넘어 평생 동안 마음을 터놓고 지냈던 친구였다. 이들이 모여 학문을 강론하고 토론했던 곳이 바로 선생이 세운 산천재였다. 선생이 39세에 예조정랑으로 벼슬길에 나아가면서 산천재는 윤선거의 학문 터전이 됐고, 1669년 윤선거가 사망하자 아들인 명재 윤증이 산천재를 강학과 학문 탐구의 본격지로 삼는다.

이처럼 선생은 호서 사림 중에서 특히 노성의 파평 윤씨가문 일가와 남다른 관계를 맺었다. 임천 유배 기간에도 이들과 수시로 왕래했고, 석호 윤문거와는 과거 급제 동기이기도 했다. 선생의 아들 유계흥은 윤문거의 딸과 결혼했고, 윤문거의 아들 윤박은 송시열의 딸과 결혼하여 이들은 겹사돈이 됐다. 유계 선생과 노성의 파평 윤씨 일가는 학연, 지연, 혈연, 혼인 등으로 엮어진 긴밀한 관계였다. 선생이 금산으로 거처를 옮겼던 것도 이들 윤씨 가문과의 이러한 각별한 관계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유계 선생이 1664년 58세로 서거하자 윤증의 부친인 미촌 윤선거는 유계의 행장을 지었다. 유계 또한 생전에 윤선거의 부친인 윤황의 묘표를 지었다. 그런가 하면 윤증은 스승의 묘지명을 짓고 유계의 문집인 시남집(市南集) 편찬에 깊이 관여한 수제자였다. 윤증은 13세 때인 1642년(인조 19년)에 유계의 문하에 들어가 배웠다. 1650년 유계가 온성으로 귀양을 가게 되자 찾아가 전송하기도 했다. 유계는 윤증에 대해 “배움에 있어 꼭 성의로 해서 게으르지 않았다”라고 평가했다.

선생은 1649년 인조가 죽자 홍문관 부교리로서 왕의 장례 절차를 상소하여 예론에 따라 제도화했다. 그러나 인조의 묘호를 정할 때 조(祖)자의 사용을 반대하고 종(宗)자를 주장하다가 이듬해 선왕을 욕되게 했다는 죄목으로 온성과 영월로 유배됐다. 1652년(효종 3년)에 풀려나 송시열과 송준길의 추천으로 시강원 문학으로 등용됐다.

역사 기록에 보면 1654년 선생은 부여에 왔다. 우암 송시열, 용서 윤원거, 미촌 윤선거와 함께 부여 고란사에서 심경을 강론하고 함께 배를 타고 호암으로 갔다는 기록이 있다. 1659년 효종께서 승하하자 대비의 복제를 기년복(朞年服·1년 동안 입는 상복)으로 하자는 입장을 대변해 3년복을 주장하는 윤휴, 윤선도, 허목 등을 좌천·유배시키는 데 역할을 한다. 1662년 예문관 제학을 거쳐 대사헌 이조참판직에 올랐다가 병으로 사직했다.

그는 율곡 이이와 김장생의 학통을 잇고, 예론에 있어서는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의 입장을 지지했다. 이이의 <동호문답>을 본받아 자신의 정치 사상을 피력한 <강거문답>을 지었다. 노론 정권 하에서 고려에 대한 역사관을 대변해주는 <여사제강>도 편찬했다. 주자의 <가례> 본문을 기본으로 하고 <의례> <주례> <대례> 등 여러 경전의 내용에서 뽑아 주를 붙여서 그것을 ‘원(原)’이라고 하고 후대 여러 학자들의 예설을 조사해서 ‘류(流)’라 하여 역사상의 예설들을 밝힌 <가례원류(家禮源流)>를 편찬한 것으로 유명하다. <가례원류>는 훗날 윤선거와 함께 저술했는지, 유계 선생이 혼자 저술했는지를 놓고 노·소론 사이에 치열한 당쟁이 벌어지는 계기가 됐다.

최근 충남도와 논산을 중심으로 이른바 ‘기호학파’에 대한 재조명 움직임이 활발하다. 논산 지역에는 사계 김장생 선생을 모신 돈암서원, 김집 생가, 명재 윤증 고택 등의 유적이 있다. 이를 바탕으로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로 상징되는 기호학파 본거지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해 퇴계 이황으로 상징되는 영남학파에 맞서겠다는 것이다.

부여는 백강 이경여 선생으로 상징되는 조선의 명문가, 유계 선생으로 상징되는 조선 유학의 대가가 있다는 면에서 충남도·논산시가 펼치고 있는 이들 흐름과 연계시켜 개발할 수 있는 바탕이 충분하다. 부여·공주가 백제 역사라는 공통점으로 공동의 발전을 모색하는 것처럼 ‘조선’ ‘유학’이라는 관점에서 부여·논산은 맥이 닿는 부분이 많다. 지역을 이끌어가는 분들이 이런 역사적인 연원을 알고 지금의 현실 속에서 지역 발전으로 승화시키는 지혜를 발휘할 필요가 있다.

남편은 ‘충신’ 부인은 ‘열녀’권이길과 그의 처 예천 임씨
부여읍 정동리에 있는 권이길과 그의 처 예천 임씨 정려. 충신과 열녀로 표창 받은 흔치 않은 사례이다. 21c부여신문

정려(旌閭)는 국가에서 미풍양속을 권장하기 위해 효자·충신·열녀 등 행실에 모범이 되는 사람이 살던 마을 입구나 집 근처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는 것을 말한다.

부여 지역에는 총 55개의 정려가 있다. 효자·효부가 41명, 열녀가 16명, 충신이 3명이다. 한 정려에 인물이 두 명 있는 경우도 있어 인물에 비해 정려의 숫자가 적다.

이 가운데 부여읍 정동리 샘골 입구에 있는 예천 임씨 정려가 특히 주목된다. 남편인 안동 권씨 권이길은 충신으로, 부인인 예천 임씨는 열녀로 정려를 받았기 때문이다. 효자·효부나 효자·열녀 등으로 정려를 받는 경우는 있어도 충신·열녀로서 정려를 받는 경우는 전국적으로도 예가 드물다.

<순조실록>에는 “예조에서 많은 선비들이 글을 올렸다. … 참판 권이길의 처 임씨를 정려하였다. 권이길이 강도(江都)에서 순절했는데 처가 따라 죽었기 때문이다”라고 나와 있다.

때는 인조 5년에 일어난 정묘호란(1627년) 때였다. 무과에 급제하여 평양판관으로 재직 중이던 권이길은 침략한 후금 군대에 맞서 싸우기 위해 출정했다. 부인 임씨는 남편이 전장에 출정하기에 앞서 붉은 비단옷을 입히고 말총으로 상투를 틀고 망포를 쓰게 하는 등 여러 표식을 하도록 했다. 혹시 남편이 전장에서 전사하게 되면 시신이라도 찾을 수 있도록 지혜를 발휘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은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조선왕조실록에 권이길이 전사하는 장면이 이렇게 나와 있다. 김기종이 치계하기를 ‘적병 한 부대가 순안(順安)으로 달려갔는데, 삭주 부사(朔州府使) 이명길(李明吉), 평양 판관(平壤判官) 권이길(權頤吉)·좌척후장(左斥候將) 정지한(鄭之罕), 파총 이충백(李忠伯)·정대익(鄭大翼) 등이 추격하여 순안에 도착하니 적들이 정대익을 장수로 알고 모두 추격하였습니다. 이충백이 말에서 내려 활을 마구 쏘아 적 두 명을 맞히고 정지한이 적 한 명을 쏘자 나머지 적들이 점점 물러갔습니다. 지한과 충백도 3∼4개의 화살을 맞았고 권이길은 화살을 맞고 바로 죽었습니다.’ 하였다.

남편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부인 임씨는 노비 두 명을 데리고 남장으로 변복한 뒤 천리길을 가 평양 보통문 밖에서 남편의 시신을 찾아 선영에 모셨다. 부인의 지혜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권이길은 이후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권이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숙종 7년(1671년)에 권이길에게 충신문이, 순조 17년(1817년)에 부인 임씨에게 열녀문이 사액되었다. 1973년 후손들이 경기도 안산에 있던 임씨의 열녀문을 부여로 이관해 두 칸의 정려문으로 중건했다.


dd 21c부여신문

필자 / 소종섭
1966년 외산 출신
부여고·고려대 졸업 시사저널 편집장
재경부여군민회 상임부회장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