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모를 신비의 절터’
‘이름 모를 신비의 절터’
  • 한봉규 국립부여박물관
  • 승인 2011.11.11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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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부여능산리절터(夫餘陵山里寺址) : 사적 제 434호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21세기 부여신문에서는 창간 7주년을 맞이해 1400여년 전 찬란했던 사비백제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우리고장 문화재를 찾아 국립부여박물관과 공동으로 기획하여 소개하기로 했다.
-편집자 주-


능산리절터 복원도 21c부여신문

백제의 국보 유물인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와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 제288호)이 출토된 곳은 백제의 왕도 사비(부여읍)를 둘러싸고 있는 나성과 사비시기(538년∼660년)의 역대 왕 묘역으로 추정되는 능산리 고분군 사이의 능뫼골 계곡에 위치하고 있는 백제시대의 절터이다.

원래 능산리절터는 능산리 뒷산의 계단식 전답으로 경작되었던 곳이다. 능산리 고분군의 전시관 주차장으로 만들어질 때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백제의 사찰임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백제 절은 부여 정림사절터(定林寺址), 익산 미륵사절터(彌勒寺址), 부여 부소산절터, 부여 능산리절터, 부여 군수리절터, 부여 왕흥사터(王興寺址) 등 대부분 절터만이 남아 있다.

능산리 절터는 왜 이 곳에 만들었을까? 침류왕 384년에 백제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후, 백제 불교는 성왕에 의해 전성기를 맞게 되어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우게 되었다.성왕(523년∼554년)은 중국 양나라와 빈번하게 교류로 불교 신앙과 숭불사업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관산성(충청북도 옥천지역) 전투(554년)에서 신라군에 패하고 죽음을 맞게 되었다.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왕이 위덕왕(554년∼598년)이다. 능산리 절은 위덕왕이 전투에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아버지 성왕의 위업을 기리고, 백제 왕들이 묻혀있는 능산리 고분군에서 아버지 성왕의 명복을 축원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운 절이라 생각된다.

능산리절터 가람배치도 21c부여신문

능산리 절터는 발굴조사에서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배치된 일탑일금당(一塔一金堂)의 가람(伽藍)배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건물을 둘러싸고 동쪽과 서쪽, 남쪽에 회랑이 돌려져 있고, 공방시설도 조사되었다.발굴조사에서는 백제금동대향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 유리제품, 금속류, 토기류, 와전류, 목제류 등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발굴조사에서 사찰의 이름을 알 수 있는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지금도 부여 사람들은 ‘능사(陵寺)’ 또는 ‘능산리절터(陵山里寺址)’라고 부른다.

※ 금당 :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는 대웅전, 본존불을 안치하는 가람의 중심 건물
강당 : 사찰에서 경전(經典)을 강의하거나 법을 이야기하는 장소
가람 : 승려들이 거주하는 사찰의 건축물


. 21c부여신문
한 봉 규 국립부여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국립청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국립춘천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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