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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기획] 숙재(肅齋) 조정구
[탐사기획] 숙재(肅齋) 조정구
  • 소종섭
  • 승인 2012.04.25 12: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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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 기행 [17]
부여는 역사와 문화, 정신의 고장이다. ‘패망한 나라 백제’의 쓸쓸함에 대하여 말하는 이들이 있으나 백제의 마지막은 비장했다. 멸망 이후의 항전 또한 치열했다. 반면 신라는 어떠했나.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나라를 스스로 고려에 바쳤다. 고려는 이성계의 쿠데타로 뒤집어졌다. 조선은 매국노들의 협력 속에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낙화암은 ‘패배’와 ‘비참함’의 상징이 아니다. 승자들의 역사 속에 그렇게 기록되었을 뿐이다. 낙화암은 차라리 목숨을 던질지언정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자존심’과 ‘항전’의 상징이다. 부여에는 낙화암처럼 잘 알려진 곳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알아야 할’ ‘새로이 의미를 부여할 만한’ 인물과 유적들이 많다.

우리는 성충, 흥수, 계백과 낙화암, 부소산, 궁남지, 정림사지 5층 석탑 등으로 상징되는 사비 백제 시대의 인물과 문화 유적에 대해 친숙한 편이다. 그러나 ‘백제’만이 부여의 전부는 아니다. 고려·조선 시대 그리고 그 이후에도 부여와 관련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은 때로는 서원에, 때로는 묘소에, 때로는 사찰에, 때로는 유적 없이 역사 속에 이름을 남겼다. 이제 이들을 재조명 해 그분들의 뜻과 정신을 되새길 때가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부여 정신’을 찾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격주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들’을 연재하는 이유이다.

한국건설업 면허 1호, 부여가 낳은 대표적인 기업가
대한건설협회 명예종신회장, 훌륭한 인품으로 존경 받아

故 조정구 회장 21c부여신문
<‘대한민국 건설업 면허 1호’인 삼부토건의 창업주이자 한국 건설업계의 대부> 부여가 낳은 대표적인 기업가인 숙재 조정구 회장은 흔히 이렇게 불린다. 1993년 10월 80세로 세상을 떠났지만 조정구 회장은 대한건설협회 명예 종신회장으로 추대된 것에서 보듯 영원한 건설인이자, 고향인 부여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불멸의 부여인이었다.

그는 1914년 10월 29일(음력 9월 22일) 장암면 석동리 331번지에서 태어났다. 풍양 조씨인 부친 동일 공(公)과 풍천 임씨 사이의 3남 3녀 중 장남이었다. 백마강에 접해 있는 석동리는 예로부터 ‘돌모루’로 알려져 있다. 석동리를 포함한 장암 일대에 유난히 바위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정구(鼎九)’라는 이름은 부친이 직접 지었다. 중국 우왕이 황하의 치수사업을 성공적으로 끝낸 뒤, 전국에서 받은 금으로 발이 아홉 개인 큰 솥을 만들어 ‘구정(九鼎)’이라고 이름 붙이고, 황하에서 잡은 늙은 거북의 등에 나타난 아홉 개의 점을 연구해 도덕정치의 아홉가지 조건으로 삼았던 뜻을 아들이 이어받기를 기대하며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조 회장이 젊었을 때 스스로 송재(松齋)라는 호를 지었다. ‘소나무’와 ‘서재’에서 따왔는데, 이것은 그가 지향하는 인간상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 뒤 처당숙 사운(沙雲) 남정환으로부터 ‘숙재’라는 호를 받았다. 중국의 기자가 지은 <홍범구주>라는 책에 나오는 대목 중에서 ‘외모는 공손해야 하고… 공손하면 엄숙하게 된다’라는 글귀에서 ‘엄숙할 숙(肅)’ 자를 따온 것이다.

조정구 회장은 세 살 되던 해에 후사가 없던 큰아버지인 동진 공의 양자가 되었다. 생부가 성실한 농사꾼이었던 데 반해 양부는 보기 드문 선비였다. 웬만한 한시는 두루 섭렵할 만큼 한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양부는 여섯 살 된 조 회장을 마을 서당에 보내 글을 배우게 했고, 가정교사격인 독선생을 두는 등 남다른 기대감을 보였다. 15세 되던 1928년 조 회장은 같은 마을에 살던 장암면장 남정국의 딸 삼순(參淳)과 결혼한다. 사위에게서 장차 큰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 장인은 그를 신학문을 익히는 배움의 길로 이끌며 적극 지원한다. 1929년 4월 부여공립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해 1931년 3월 졸업할 수 있기까지는 막후에 장인의 후원이 있었다.
백제중학교 교정에 세워진 故 조정구 회장의 동상에 맏아들인 조남욱 회장이 꽃을 올리고 있다. 21c부여신문

조 회장이 자신의 운명을 가를 ‘건축’과 만나게 된 것은 이후 서울 이화동에 있던 관립경성공업학교 건축과에 입학하면서이다. 조 회장은 서울로 올라오면서 애초에 철도원 양성소에 지원했다. 당시는 철도가 가장 중요한 운송수단이었기에 철도공무원이 되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낙방한 것이 결과적으로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1936년 관립경성공업학교를 졸업했는데 졸업 당시 성적표에는 <특히, 수학과 건축사, 철근 콘크리트 및 철골 구조, 공장 요령 등의 전공과목에서 우수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일제 치하에서 취업은 일본인이 우선이었기에 졸업과 함께 직장을 갖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경기도청 회계과에 취직하는 것이었다. 그는 주로 설계업무를 맡고 있었으나, 간혹 공사현장에 감독으로도 나가면서 건축 전반에 대해 성실한 태도로 실무를 익혔다.

조 회장이 공직을 떠나 창업을 결심하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였다. 경기도청 회계과 영선계장으로 있던 1947년 말 당시, 경기도지사를 비롯한 고위공무원들과 술자리를 하는 자리에서 참석자들이 한결같이 조 회장의 업무 능력과 성실성을 칭찬하며 “기술자들은 승진이 늦으니 사무직으로 전환하라”라고 말한 것이다. 이를 들으며 그는 “이 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이 기술인데 고위공무원들의 인식이 이렇다니…”라고 생각하며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35세 되던 1948년 3월 조 회장은 위경련으로 인한 수술을 받고 병원에 누워 있는 상태에서 경기도청에 사직서를 써서 보낸다.

조 회장은 창업하는 회사의 이름을 ‘삼부토건’으로 정했다. ‘삼부(三扶)’의 ‘삼(三)’은 삼각형을 뜻하는 것으로 ‘건설’ ‘안정’을 상징한다. ‘부(扶)’는 자조를 뜻하며 ‘스스로 개척하고자 하는 의지’를 내포한다. 형제 간의 우애, 고향인 부여를 상징하는 의미도 함께 들어 있다. 1948년 4월 1일 서울 중구 주교동 203번지에 ‘삼부토건’ 간판이 걸렸다. 한국 건축사의 시작이었다.

1962년 5월 삼부토건은 국내 건설업 면호 1호를 획득하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건설업체로 성장했다. 1963년 8월에는 대한건설협회 제5대 회장에 취임하면서 명실상부하게 한국 제일의 건축인이 되었다. 1961년 군사정부에 의해 폐간된 <건설통신>을 <건설통보>라는 이름으로 복간했고, 기술자 재교육 및 기능공 양성교육을 위해 건설기능양성소를 설립해 우수한 인재를 길러내기 시작했다. 또한, 건설공제조합을 설립해 국가 또는 공공기관에 예치되어 있던 건설업체들의 보증금을 조합에 이체토록 했다. 지금도 조 회장이 건설업계의 발전을 위해 이룩한 업적 가운데 첫 번째로 ‘건설공제조합 설립’을 꼽는 이들이 많다.
숙재 조정구 선생 기공비(대한건설협회종신 명예회장) 21c부여신문

1963년 8월 17일부터 1975년 2월까지 12년 간 여섯 번이나 대한건설협회 회장을 역임한 조 회장은 대한건설협회 종신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온유하고 성실한 성품, 사심 없는 헌신적인 봉사, 사비를 털어 협회 운영비를 충당했던 그는 회원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건설업계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하며 건설인들의 단합과 화합을 위한 기반을 다졌다. 그는 이 때문에 건설인 안팎으로부터 ‘업계의 갈등을 불식하고 건설업 발전의 든든한 기틀을 마련한 영원한 회장’으로 평가 받았다.

조 회장은 건설인 최초의 국회의원이라는 기록도 갖고 있다. 1981년 3월 한국국민당의 비례대표로 제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이다. 그는 “타의 반 자의 반으로 정계에 진출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당시의 시대상은 혼란스러웠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한 나라의 대통령이 비명에 가는 그런 시대에 사는 우리 모두가 불행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한 번쯤 정치판에 나서서 올바른 소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한 적이 있다. 열심히 의정활동에 임했지만 실망도 컸던 것 같다. 4년 뒤 국회를 떠나면서 언론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좋은 경험을 했다. 4년 동안 새삼 느꼈던 것은 기업인은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기업인이 정치를 해서 이로운 것은 없다. 단,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진정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지역과 업계를 위해서라면 그것은 별개이다”

그는 극히 검소했다. 생전에 입고 먹고 사용하는 것 중에 가격이 비싼 것이 없었다. 삶이 그러했다. 평소 남대문시장 안 순대국집을 즐겨 찾거나 부여에 갈 때면 된장국을 잘 끓이는 작은 식당을 찾곤 했다. ‘검소한 생활이 경제대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생각은 조 회장의 일관된 철학이었다. 1950년 전쟁이 일어나자 조회장은 장남인 조남욱 회장을 서울로 불러 입대통지서를 내밀었다.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이었기에 주위 사람들이 말렸으나 조 회장은 일축했다. 1950년 12월 19일 소집 장소에 나온 사람은 17명의 경기고 동창 가운데 조남욱 회장이 유일했다. 효성도 극진해 바쁜 와중에도 한 달을 넘기지 않고 고향의 부모를 찾았고, 행여 병환이라도 나면 그 곁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1962년에는 백제중학교 재단(백제학원) 이사장직을 수락했다. 지역 주민들의 요청도 있었지만 평소 기업 이윤은 사회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던 것이 교육사업에 참여한 가장 큰 이유였다.
장암 덕림고개에 있는 故 조정구 회장의 묘. 21c부여신문

조 회장은 ‘안정이 성장의 초석’이라는 믿음 아래 작아도 내실 있는 기업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곤 했다. “기업·신용·친절을 우선하며, 양보다는 질을 생각하며, 눈앞의 이익을 노리기에 앞서 백년대계의 목표를 추구하는 기업이 되어야 한다”라는 것이 그의 기업관이었다. 조 회장은 1993년 10월 25일 향년 80세로 영면했다. 김영삼 대통령을 대신해 주돈식 정무수석비서관이 조문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 김종필 민자당 대표와 국무위원 등 2천 여명이 조문했다. 4일 뒤인 10월 29일 오전 6시 30분, 서울 중구 남창동 삼부토건 사옥 앞 뜰에서 회사장으로 장례를 치른 뒤 오후 임천면 만사리에 영원히 몸을 뉘었다.

조 회장의 장남인 조남욱 회장 등이 30억원을 출연해 1994년 4월 1일 발족한 숙정장학재단은, 수천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 혜택을 주면서 인재 양성이라는 고인의 뜻을 실천하고 있다. 1995년 10월 4일 대한건설협회 등 13개 건설단체들의 모임인 한국건설단체연합회는 모든 건설인의 이름으로 고인의 업적을 기리는 기공비를 임천면 만사리에 건립했다. 당시 한국건설단체연합회 정주영 회장은 “항상 성실시공과 책임시공을 강조하신 고인의 말씀은 오늘날 건설업계에 불어 닥치는 환경 변화의 찬바람을 이겨낼 수 있는 지침이라 생각 된다”라고 강조했다.
조정구 회장(맨 왼쪽)이 정주영 회장 등과 함께 경제협력사절단의 일원으로서 소련을 방문했을 때. 21c부여신문

내가 본 조정구 회장...


<김종필 전 국무총리>


숙재 선생은 우선 성격이 매우 꿋꿋한 분이다. 1961년 군사혁명 이후 건설업을 하는 분들이 국가를 위해 큰 일을 맡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숙재 선생은 솔선수범하여 국가 경제 부흥에 크게 기여했다. 자신의 이익보다 업계의 발전과 국가 발전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으신 점은 지금까지도 큰 업적으로 남아 있다. 숙재 선생은 매사에 원칙과 룰을 지킨 분이다. 기업을 꾸려가는 면에서는 물론이고, 잠시 정치 외도를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지금도 숙재 선생의 따뜻한 격려와 도움을 가슴 깊이 담고 있다. 어려울 때면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는 듯한 그 손길이 그립다.


<황인성 전 국무총리>


저에게 조정구 회장님은 언제나 ‘큰 어른’이셨다. 항상 넉넉하신 웃음과 남을 먼저 생각하는 부드러운 마음, 매사에 신중하고 성실하시며 눈앞의 이익을 떠나 무엇이든 크고 넓게 생각하시는 여유로운 마음, 바로 그런 모습들이 저의 뇌리에 남아 있다.


<이현재 전 국무총리>


세상을 흔들었던 정주영 회장도 조정구 회장님만은 늘 깎듯하게 모셨다고 한다. 건설업계에서는 정주영 회장이 기업적인 면과 경제적인 능력 면에서 훨씬 큰 회사를 만들었지만, 인간적인 면에서는 조정구 회장이 훨씬 큰 존경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안경모 전 교통부장관>


한국의 건설업은 사실상 조정구 회장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정구 회장은 한국에 처음으로 ‘건설산업’이라는 이름을 가능하게 만든 진정한 건설인이었다. 한국의 건설업 역사를 이야기 할 때 조정구 회장이라는 이름을 빼놓아서는 아예 그 역사가 성립되지도 않을 것이며, 의미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유치송 전 민한당 총재>


건설업계를 비롯한 많은 분야에서 남다른 경륜을 쌓아오신 분임에도, 조정구 회장님은 항상 겸손하고 과묵하셨다. 그리고 체격에 비해 그 내면의 넉넉함은 가히 대인이라는 호칭이 어울릴 듯하였다. 숙재 조정구 선생 기공비(대한건설협회종신 명예회장)나는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서 조정구 회장님이 정치에 발을 들이는 일이 못내 아쉬웠다. 그분은 정치를 하시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이고 훌륭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채문식 전 국회의장>


한 번은 숙재 선생이 국회 회기를 끝내고 당시 미국에 있던 막내 아들을 만나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귀국하는 날 비서관이 마중을 나가서 공항의 귀빈 통로로 모시고 나왔는데, 숙재 선생은 엉겁결에 따라 나왔다가 뒤늦게 당신이 귀빈 통로를 이용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는 비서관을 호되게 야단쳤다고 한다. “내가 국회의원으로서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여행을 다녀오는 길인데 귀빈 통로를 이용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과연 숙재 선생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정구 회장 약력]
1914년 10월 29일 장암면 석동리 출생
1928년 12월 24일 의령 남씨 삼순(參淳) 여사와 결혼
1931년 3월 부여공립보통학교 졸업
1936년 3월 관립경성공업학교 건축과 졸업
1936년 5월~1948년 3월 경기도청 공무원
1948년 4월 1일 삼부토건 창립
1962년 학교법인 백제학원 재단이사장 취임
1963년 8월~1975년 대한건설협회 회장 6선 연임
1975년 2월 대한건설협회 종신 명예회장 추대
1981년 3월 제11대 국회의원 당선
1991년 10월 부여군민대상 수상
1993년 10월 향년 80세 영면


ㅇㅇ 21c부여신문

필자 / 소종섭
1966년 외산 출신
부여고·고려대 졸업 시사저널 편집장
재경부여군민회 상임부회장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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