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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아침] 백조(白鳥)와 놀던 호수
[목요아침] 백조(白鳥)와 놀던 호수
  • 이규원
  • 승인 2015.09.22 14: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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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행정체험기 14>

1999년 11월 21일 대전광역시에서 부여군으로 전입할 때 보직이 郡사무소 課長인줄 알았더니 충화면장이었다. 동쪽 끝 초촌(草村)에서 서쪽 끝 80리 길을 통근하자니 불편하여 부여박물관 앞 아파트로 老母를 모셨다.
9년 간 廣域市에서 시책(施策)을 기획하거나 관리하는 일 하다 갑자기 최전방에 서보니 낯설었다. 업무 파악 하느라 사무실에 며칠 간 박혀 있을 때 친구 장창순 충화파출소장이 찾아와 “주민들이 면장 보고 싶어해”라고 말해주어 모든 것 중단하고 경로당과 사랑방 등으로 달려가 신고하였다. 마을 속을 훑다보니 음주운전 상태로 퇴근해야 했으며 그때마다 파출소장이 앞에서 엄호해주었다.

부여 제2지역 道 議員(강창구)이 중도 하차하여 2000년 6월 26일 보궐선거에 충화 유병기(前 郡의원) 씨가 출마하였다. 이장회의 마당에서 마이크 잡고 “지역인사가 당선되도록 총력을 다하자”고 제안하였다. 이 행태는 선거법 위반이지만 애향심(愛鄕心)을 믿었다. 결과는 무투표 당선이었으며, 내리 4選을 유지하고 2010년에는 道 議長도 당선되었다.

2000년 여름에 면사무소를 은행창구 식으로 개조하고 창호(窓戶)도 통유리로 바꿨더니 직원과 주민들이 환호하였다. 국토관리청 시행 ‘임천우회도로공사’가 2000년 연말 준공 목표로 진행되었는데 충화면으로 연결되는 출입로(出入路)가 없어서 ‘추진위원회(위원장 신태현 우체국장)’를 조직하고 ‘청원서’를 ‘고충처리위원회’에 제출했더니 지역출신 강화평 조사관이 확인 나오고 거들어 주어 12억 원의 정부예산으로 출입로를 개설(開設) 할 수 있었다.

팔충제(八忠祭)는 충화 주민들이 1980년에 부소산 三忠祠 구(舊)건물을 지석리로 옮겨 건축(250여 명이 白米 1가마씩 희사)하여 팔충사(八忠祠)라 이름 짓고 충화에서 출생·성장하였다는 계백 성충 흥수 복신(장군) 도침(승려) 억례복류(달솔) 곡나진수(장군) 혜오화상(승려) 등 八忠臣과 5千결사대의 제향(祭享)이 축제로 발전된 것이었다.

2000년 11월 1일 제21회 팔충제도 ‘충화번영회’ 명칭으로 거행하였는데 고천제 성화채화 성화봉송행렬 팔충신제향 무대공연 등 5가지였으며, 군 단위 기관단체장과 500여 명의 관중이 모였다. 행사별로 주관 단체가 있지만 모든 책임은 面 職員 몫이었다.

군수가 초헌관인 ‘팔충신제향’이 신경 쓰여서 행사 전야에 제관들을 팔충사로 모이게하여 홀기(시나리오)대로 리허설(rehearsal)을 해보니 막히는 게 많았다. 연습 효과는 다음 날 제향 때 매끄러운 진행으로 나타났다. 뒤풀이 행사 무대공연(舞臺公演)은 악단과 함께 초청된 가수 오남일이 진행하였다. 노래자랑 시간에 국회의원(김학원)도 목청을 뽑아 주었다.

그런데 마무리가 문제였다. 난데없이 국부(局部)만 가린 여자무용수가 깜짝 출연하여 흔들고 사라지는 바람에 경악해야 했다. 사태 수습은 지역 어른들에게 달려가 “죽을 죄를 지었다”며 용서를 비는 수밖에 없었다.

연말에 큰 눈이 내려 옥산면과 경계한 ‘진동고개’로 직원들 모시고 나가 삽질 하고 모래 뿌렸더니 미끄러져 내려오는 자동차 기다리던 레커(wrecker)차 기사가 ‘오늘 장사 망했다’는 표정 흘리며 이동하는 게 보였다. 그후부터 폭설 내리면 지석리 주민들이 먼저 나와 눈 쓸고 모래를 펴 주었다.

한겨울 복금(만지)저수지에 철새 수 천마리가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다. 진객 백조(고니)도 있었는데 많을 때는 23마리나 되었다. 출근하다 넋을 잃고 선경(仙境)에 빠지곤 하였다.

ㅎ퓨 21c부여신문

이 규 원
전 부여군 기획감사실장
21세기 부여신문 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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