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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기획] 『우리가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 기행』 ①
[탐사기획] 『우리가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 기행』 ①
  • 21c부여신문
  • 승인 2011.11.11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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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사의 충신들’<上>
부여는 역사와 문화, 정신의 고장이다. ‘패망한 나라 백제’의 쓸쓸함에 대하여 말하는 이들이 있으나 백제의 마지막은 비장했다. 멸망 이후의 항전 또한 치열했다. 반면 신라는 어떠했나.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나라를 스스로 고려에 바쳤다. 고려는 이성계의 쿠데타로 뒤집어졌다. 조선은 매국노들의 협력 속에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낙화암은 ‘패배’와 ‘비참함’의 상징이 아니다. 승자들의 역사 속에 그렇게 기록되었을 뿐이다. 낙화암은 차라리 목숨을 던질지언정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자존심’과 ‘항전’의 상징이다. 부여에는 낙화암처럼 잘 알려진 곳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알아야 할’ ‘새로이 의미를 부여할 만한’ 인물과 유적들이 많다.

우리는 성충, 흥수, 계백과 낙화암, 부소산, 궁남지, 정림사지 5층 석탑 등으로 상징되는 사비 백제시대의 인물과 문화 유적에 대해 친숙한 편이다. 그러나 ‘백제’만이 부여의 전부는 아니다. 고려·조선시대 그리고 그 이후에도 부여와 관련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은 때로는 서원에, 때로는 묘소에, 때로는 사찰에, 때로는 유적 없이 역사 속에 이름을 남겼다. 이제 이들을 재조명하여 그분들의 뜻과 정신을 되새길 때가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부여 정신’을 찾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호부터 격주로 ‘우리가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 기행’을 연재하는 이유이다.

‘의열사의 충신들’<上>
도유사 류희열 선생이 의열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1c부여신문

부여읍 동남리 산 3번지에는 의열사(義烈祠)가 있다. 부여청소년수련원(이하 수련원) 뒤편인데 처음 찾아가는 이에게는 찾기가 쉽지 않았다. 역사·문화적인 가치에 비해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서인지 찾는 이들이 많지 않다는 반증이었다.

의열사(義烈祠)를 찾은 날은 장마 뒤 후텁지근한 기운이 가득했던 지난 7월 30일이었다. 땀을 흘리며 수련원 옆으로 난 좁은 골목길을 지나 가파른 길을 올라가니 의열사가 있었다. 도유사 류희열 선생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의열사는 부여에서 가장 오래된 서원이다. 선조 임금 때인 1575년 당시 부여현감이었던 홍가신이 세웠다. 당시에는 부여 용정리 망월산 경룡사 북쪽에 세웠는데 이름을 현의사(顯義祠)라고 했다. 3년 뒤 선조로부터 ‘의열사(義烈祠)’로 사액을 받아 사액 서원이 되면서 이름이 바뀌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1866년 폐쇄되었다가 1924년부터 유림들이 다시 옛터에 단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의열사는 부여에서 가장 오래된 서원이고 백제, 고려, 조선의 충신 여섯명을 모셨다 21c부여신문


1970년에 들어서야 지금 자리로 옮겨 사우를 중건했다. 의열사는 또 백제, 고려, 조선의 삼조(三朝)에 걸쳐 부여의 충신들을 모신 곳이라는 특징이 있다. 이곳에는 충신 여섯 명이 모셔져 있다. 성충·흥수·계백은 백제, 이존오는 고려, 정택뢰·황일호는 조선의 충신이다. 정택뢰·황일호는 서원이 세워진 뒤 1581년 추가로 배향되었다. 율곡 이이 선생이 ‘의열사기(義烈祠記)’를 지었으며 서애 유성룡 선생이 ‘의열사 관선당기(義烈祠 觀善堂記·관선당은 의열사에 배향된 인물들의 충의 정신을 익히는 강당이었다)’를 썼을 정도로 비중 있는 서원이었다. 경내에는 의열사 묘정비가 있는데 비문은 정호가 짓고, 글씨는 이간이 썼으며, 1723년(경종 3년)에 세웠다.
의열사 관선당에 걸려 있는 율곡 이이가 쓴 ‘의열사기’ 21c부여신문


이존오는 고려 시대의 충신이다. 경주 이씨이다. 호는 석탄(石灘) 또는 고산(孤山)이었다. 충혜왕 2년(1341년)에 나 공민왕 20년(1371년)에 죽었으니 불과 30년을 살았으나 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는 1360년 문과에 급제한 뒤 사관에 발탁되었다. 25세 때인 공민왕 15년에 우정언(右正言·고려시대 중서문하성에서 조칙(詔勅)을 심의하고 임금에게 간하여 잘못을 바로잡게 하는 간쟁을 맡아보던 낭사의 종 6품 벼슬)이 되어 신돈의 횡포를 규탄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다.

부여 의열사지 편집위원회가 1992년 낸 ‘부여 의열사지’에는 《장사(전북 고창군 무장면)감무로 좌천되었으나 그래도 극렬한 상소를 올리니 왕이 불러 친히 문책했다. 왕과 함께 앉아 있는 신돈을 보고 눈을 부릅떠 ‘노승은 어찌 무례함이 이 같은고!’ 하고 꾸짖으니 신돈이 놀라서 의자에서 떨어졌다》 《아직 젖내 나는 동자인데 반드시 뒤에 늙은 여우처럼 사주하는 이가 있을 테니 바로 대라고 했다. 그러자 선생은 나라에서 언관(言官)의 임무를 주었으니 어찌 말을 하지 않고 국가를 저버릴 것인가 라고 했다》고 쓰여 있다.

옥에 투옥된 뒤에 신돈 등이 죽이려고 했으나 목은 이색 등이 《태조 이래 4백년 간 한 사람의 간관(諫官)도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왕으로 하여금 간관을 죽이게 하면 악성(惡聲)이 널리 퍼질까 두렵다》하고 변호하여 겨우 극형을 면했다. 이후 신돈의 횡포가 더욱 거세졌으며 언로가 막혔다. 이후 석탄(石灘·지금의 부여 저석리)에 은거했으나 날로 신돈의 권세가 떨쳐 가는 것을 보며 얻은 울분때문에 병을 얻어 운명했다. 죽기 직전 “아직도 신돈이 성(盛)한가?”라고 묻고 “그렇습니다”하니 도로 누워 “내가 죽어야 마침내 신돈도 죽으리라”하더니 바로 자리를 돌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존오가 석탄에서 읊은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존오의 아들인 이래의 부탁으로 안로생이 지은 <석탄정기>에 당시 이존오의 행적이 일부 수록되어 있다.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신월리에 이존오를 제사지내는 단이 있으며, 부여읍 저석리에 그를 기리는 정려가 있다. 서애 유성룡은 ‘의열사 관선당기’에서 “고려 공민왕의 어지러운 정사를 당하여 늙은 중이 국정을 전횡함에 따라 비록 이름 있는 자라도 그에 호응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존오 공은 신진의 약한 사람으로 조정에서 신돈을 꾸짖되 놀라 꺼리지 않고 충의에 집착한 뜻은 죽음에 임해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라고 썼다.

더운 여름 날, 의열사에서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길고 오래 부귀를 누리는 이는 누구이고 짧고 굵게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이는 누구인가. 그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시공을 넘어 이존오가 지금의 부여에 온다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의열사를 떠나오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소종섭 21c부여신문
필자 소종섭
부여고·고려대 졸업
시사저널 편집장
재경부여군민회 상임부회장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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