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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아침] 만주 부여(扶餘)역을 지나며...
[목요아침] 만주 부여(扶餘)역을 지나며...
  • 김진환
  • 승인 2015.12.08 11: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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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부여역의 모습. 21c부여신문


누구에게나 고향은 그립고 애틋한 곳이다.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고향 쪽으로 둔다든지, 연어가 반드시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오는 이치와 같다. 누구나 제 고향이 남다르게 느껴지지만 내 고향 사비성 부여는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과 그곳에 서린 역사의 한(恨)으로 인해 더욱 각별하다.

더욱이 지난 7월 부여정림사지(국보9호 백제탑), 부여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낙화암 등), 부여 능산리 고분군, 부여 나성 등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더욱 뜻 깊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부여라는 명칭은 원래 도시 이름이 아니라 나라 이름이다. 부여는 고조선에 이어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494년까지 약 700년 간 북만주(현재 중국 길림성과 흑룡강성 일대)를 지배했던 고대국가이다.

중국의 사서(史書)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부여를 시작으로 고구려·옥저·동예·읍루·한(韓)·왜(倭)가 순차로 기록되어 있다. 부여가 여러 나라 중 맨 먼저 나오는 것은 역사의 출발점이라는 의미가 있다. 동이전은 “부여가 아주 부유했고, 3세기 중엽까지 한 번도 이웃나라 침략으로 파괴된 적이 없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최근 ‘처음 읽는 부여사’라는 부여 통사를 저술한 송호정 교수는 “부여가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춘 나라이고 문화의 원형을 간직한 나라로서 우리 고대사의 중심이자 원류”라고 평가하였다.

부여국의 왕자 주몽이 고구려를 건립하였고, 주몽의 아들인 온조가 남하하여 백제를 세웠으며, 두 나라 모두 부여국의 후예임을 자처하였으니 부여가 우리 역사의 원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실제로 ‘삼국사기’는 고구려와 백제의 왕들이 부여국의 시조인 동명왕을 제사지내는 사당을 갖추고 항시 배알(拜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왕의 성(姓)이 「부여」 씨인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처음에는 같은 뿌리임을 의식하여 우호적으로 지냈으나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반까지 치열한 전투를 치뤘다. 그와 같은 불화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부여 동명왕의 법통계승에 관한 경쟁 의식도 작용한 듯하다.

백제 근초고왕은 371년 고구려 평양을 쳐서 고국원왕을 죽였고, 고구려 장수왕은 475년 백제 한성을 함락하여 개로왕을 죽였다. 이로 인하여 고구려와 백제가 부여 동명왕의 법통을 함께 나눴다는 연대의식이 크게 균열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 뒤 백제는 절치부심하여 웅진성(공주)에서 점차 국력을 회복하고 538년 사비성으로 천도하면서 국호를 「남부여」라고 고쳤다. 이는 고구려에 병합된 동부여와 북부여의 국맥(國脈)을 자신이 계승한다는 의지의 발현이라고 할 것이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경우에도 727년 발해의 무왕(武王)이 일본에 보낸 편지에서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遺俗)을 가지고 있다”라고 기술한 점에서 볼 때 발해가 그 정신적 자산의 근원을 부여에서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부여라는 명칭은 2300년이 넘는 참으로 고색창연한 이름이다. 백제(남부여)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패망될 때 사비성은 7일 간 불타 초토화되었지만 그 이름만은 도시 이름으로 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역사의 무상(無常)함과 장구(長久)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만주 벌판의 모습. 21c부여신문

이번에 필자가 부여와 관련하여 그와 같은 감상을 극적으로 느끼는 계기가 있었다. 지난 9월 필자는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으로 중국 길림성 장춘(長春)에서 개최된 국제반부패포럼에 참석하고 흑룡강대학교와 교류협력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기 위하여 장춘에서 급행열차를 타고 흑룡강성 하얼빈으로 이동하였다.

기차가 그 중간에 한 번 정차하였는데 그 역이 바로 ‘부여역’이었다. 한자는 扶餘의 중국식 약자인 扶余였는데 만주에서 고향의 이름을 발견한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적인 일이었는지 모른다. 깜짝 놀라 같이 간 일행에게 사진을 찍게 하였다. 정확한 역명은 부여북참(扶余北站, Fuyu North Railway Station)이었다. 뒤에 알아보니 그곳 부여현은 길림성 송원시(松原市)에 속하는 도시로 인구는 75만명 가량이라고 한다.

급행열차가 서는 도시이므로 아주 작은 도시는 아니고, 이 철도역은 부여의 북쪽에 위치한 것 같은데 최근 시설인지 현대적이고 아주 깨끗하였다. 고대 부여국이 길림성의 중심을 흐르는 송화강 유역 사방 2000리를 차지하였다고 하니 현재 중국 길림성을 중심으로 하고 흑룡강성까지 방대한 영역인 듯하다.

부여현이 부여국의 수도였는지는 아직 고증되지 않았으나, 부여의 이름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옛 부여의 중요한 거점인 것은 분명할 터이다. 내 고향 부여처럼 나라는 소멸한지 오래인데 그 이름만은 도시에 남아 2000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긴 역사의 현장이다. 그래서 시공을 넘어 충남 부여와 만주 부여 간에 친밀한 유대감을 느끼고 역사의 흔적은 참으로 끈질긴 것이구나 하는 상념에 젖게 되었다.

다시 기차로 하얼빈까지 50분 가량 이동하면서 주변에 펼쳐진 끝없는 만주 대평원은 정말 감격적인 풍광이었다. 하늘과 땅이 지평선으로 맞닿은 드넓은 대지를 보면서 아! 우리 선조들이 지배하고 호령했던 영토가 이토록 장대했구나!! 하는 감탄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만주 부여역을 지나면서 우리 고대사에 대한 연구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역사 교과서 국정화로 소모적 논쟁을 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해방 이후의 역사는 아직 검증 과정에 있으므로 좌든 우든 편향된 평가는 아직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현대사에 대한 시비에 발목이 잡혀 고대사, 중세사 등 우리 역사 전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비틀린다면 참으로 걱정스러운 일이다.

역사는 오늘의 맑은 거울이고 내일의 훌륭한 스승이라고 한다. 우리 고향 부여의 이름에서 우리 민족사의 원류인 부여국의 웅혼한 기상을 찾아내어 민족의 자존심을 드높이고 이를 미래의 원동력으로 삼는 일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본다.

21c부여신문

김 진 환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재경부여군민회장
법학박사, 전 서울중앙지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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