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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에 위치해 화려한 경관의 큰 사찰
강가에 위치해 화려한 경관의 큰 사찰
  • 21c부여신문
  • 승인 2011.11.11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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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여 왕흥사 절터(夫餘 王興寺址) : 사적 제427호(충남 부여군 규암면 신리)
21세기 부여신문에서는 창간 7주년을 맞이해 1400여년 전 찬란했던 사비백제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우리고장 문화재를 찾아 국립부여박물관과 공동으로 기획하여 소개하기로 했다.
-편집자 주-


왕흥사지 원경. 21c부여신문

부여 왕흥사 절터(夫餘 王興寺址) : 사적 제427호(충남 부여군 규암면 신리)

백제에 처음 불교가 전래된 것은 침류왕(枕流王:재위 384년∼385년) 원년 384년 때이며, 백제 불교는 성왕(聖王:재위 523년∼554년)에 의해 전성기를 맞게 되어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우게 되었다.
왕흥사 절터는 1934년 고려시대의 암키와 조각에 ‘왕흥(王興)’이라는 명문기와(사진)가 발견돼 규암면 신리 일대가 막연히 절터(寺址)라고 추정하고 있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2001년에 이곳에서 다시금 ‘왕흥(王興)’이 새겨진 고려시대 기와가 출토돼 비로소 이 지역이 왕흥사 절터(王興寺址) 였음을 알게 됐고 왕흥사는 백제 이후에도 고려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운영됐다.
왕흥사(王興寺)는 부소산성 낙화암에서 바라보면 백마강 건너편에 자리잡고 있는 백제시대의 절터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 등 옛 문헌에 내용이 기록돼 있는 왕실의 원찰(願刹)과 관련 있는 중요 사찰이다.
왕흥사 복원조감도. 21c부여신문


왕흥사는 창건 시에는 승려가 30여 명이 수도를 할 정도로 큰 사찰이었으며, 절은 강가에 위치해 경관이 매우 화려하고 아름다운 경치를 갖추었다고 한다.
특히, 왕흥사는 ‘삼국유사’ 기록에 왕이 배를 타고 건너가 절에 들어가서 향을 피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발굴조사에서 선착장이 확인됐고 배에서 내린 왕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어도(御道)를 따라 경내로 들어간 시설도 확인됐다.

왕흥사의 가람배치는 사비백제 시기의 전형적인 사찰구조인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일렬로 배치된 1탑 1금당식의 가람구조를 하고 있다.
백제시대의 목탑터 심초석에서는 봉안된 금제사리병(내병), 은제사리병(외병), 글씨가 새겨진 청동제사리함 등의 사리용기가 출토됐으나 실제 사리는 확인되지 않았다.
‘왕흥’이 새겨진 기와. 21c부여신문


심초석 남쪽 면을 중심으로 출토된 사리공양구를 비롯한 금은세공품, 구슬류, 옥제품, 운모로 만든 연꽃, 중국의 남북조시대에 사용됐던 북제(550년∼577년)의 상평오수전 등 다양하고 세밀한 유물 등을 통해 당시의 백제 왕실의 불교문화와 백제의 공예, 건축기술, 대외교류 관계 등을 엿볼수 있다.

※원찰(願刹) :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거나 자신의 소원을 빌기 위해 건립한 사찰로 왕족이 건립했다.


한 봉 규 국립부여박물관 21c부여신문

한봉규 국립부여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국립청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국립춘천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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