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적으로는 길게 보는 것.
사물을 긴 호흡의 관점에서 확대해 보는 안목.
사람들은 늘 자기 관점에서 상대를 본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얽매여 사물을 본다. 그렇게 보면 제대로 판단하기가 어려워진다. 어떻게 행동할까는 좀 뒤로 돌려놓고 먼저 있는 그대로 보라! 이것이 우리를 해탈과 열반으로 이끄는 여덟 가지 올바른 길 팔정도(八正道)의 첫 번째 길인 정견(正見)이다.
강의 상류에 폭우가 쏟아져 하류로 물이 흘러드는데도 하류에는 비가 오지 않으니 괜찮을 거라고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아무 대비를 하지 않는다면 십중팔구 수해를 입게 된다. 실제는 어떠한가? 상류에 비가 와서 하류도 얼마 안 가 둑이 넘치게 된다는 것,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 실상이다.
그럼 실상을 제대로 보고 나면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즉,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상류에 비가 와서 홍수가 진다 해도 강수량, 강폭, 강의 깊이, 현재 저수된 물의 양 등을 따져보아 둑이 넘치지는 않고 그냥 지나갈 수준이라고 판단되면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난리법석을 떨어도 태연히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둑이 넘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다른 사람들이 다 괜찮다고 해도 둑을 쌓아야 한다. 그러나 강수량이 너무 많아 둑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다고 판단되면 일단 높은 곳으로 피신하고 볼일이다.
이렇게 인생을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정견이 필요하다. 하지만 정견만 가지고는 안 된다. 바로 보았으면 거기에 따른 올바른 판단이 서야 한다. 이를 가리켜 정사유(正思惟)라 한다. 정견과 정사유를 지혜라 한다.
수행이란 무엇인가? 지혜롭게 살아가는 법이다. 사람들은 ‘내가 잘났다’ ‘내가 옳다’는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한다. 아상(我相)에 사로잡혀 잘못 판단하고 행동한다. 무지의 근원인 ‘내가 옳다’라는 바로 그 아상의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부족합니다. 제가 틀렸습니다’ 하고 절을 하며 숙이는 게 참회 수행이다.
도저히 이해 못 할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그가 왜 저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건지, 그가 자란 성장 배경과 그의 마음을 가만히 살펴보는 것이 수행이다. 이렇게 해서 그를 이해하게 되면 내가 덜 답답하게 된다. 더 나아가 그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에 대한 자비심이 일어난다면 내가 그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도 있다. 그런데 내 생각에 사로잡혀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내 생각만 주장하고 상대를 뜯어고치려 하면, 나는 나대로 답답하고 상대는 상대대로 괴롭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우리는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다.
항상 현재에 깨어 있기는 참 어렵다. 사건이 생기면 저도 모르게 거기에 휘말리고, 한참을 지내놓고 나서야 알아차리고 후회하게 된다. 당시로서는 정말 큰일이었던 일도 지금 와서 보면 별것 아닌 일로 느껴지는 것이 많다. 그러니 지금 닥친 큰일도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보면 별것 아닌 일로 생각될 수 있음을 미리 짐작해볼 수 있다. 즉, 과거를 돌이켜 미래의 관점에서 현재를 바로 보는 것이다.
또 나에게는 이 일이 큰일이지만 제3자의 시각으로 보면 이 일이 별것 아닌 일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내 일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즉, 공간적으로는 넓게 보고 시간적으로는 길게 보자는 것이다. 자기 생각에만 사로잡히거나 그 순간에만 집착하면 시야가 좁아지고 단견에 빠진다. 사물의 일부분이나 어느 한 면만을 보고 결정하면 나중에 크게 후회하기 쉽다.
그 어떤 경우든 사물을 긴 호흡의 관점에서, 주관적 이해관계가 아닌 다른 사람의 처지까지 확대해서 보는 넓은 안목을 가져야 한다. 바르게 볼 때 비로소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법이다. 첫 단추를 바르게 꿰지 못하면 그 뒤의 단추는 계속해서 잘못 꿸 수밖에 없다. 부처님 법을 공부하는 가장 중요한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이 인생을 바르게 사는 근본 바탕이다.
![]() 법륜스님 평화재단 이사장 수행공동체 정토회 지도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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