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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기획]충정(忠貞)공 윤집 선생 - 여섯번째
[탐사기획]충정(忠貞)공 윤집 선생 - 여섯번째
  • 소종섭
  • 승인 2011.11.12 16: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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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기획]『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 기행 』여섯번째
부여는 역사와 문화, 정신의 고장이다. ‘패망한 나라 백제’의 쓸쓸함에 대하여 말하는 이들이 있으나 백제의 마지막은 비장했다. 멸망 이후의 항전 또한 치열했다. 반면, 신라는 어떠했나.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나라를 스스로 고려에 바쳤다. 고려는 이성계의 쿠데타로 뒤집어졌다. 조선은 매국노들의 협력 속에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낙화암은 ‘패배’와 ‘비참함’의 상징이 아니다. 승자들의 역사 속에 그렇게 기록되었을 뿐이다. 낙화암은 차라리 목숨을 던질지언정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자존심’과 ‘항전’의 상징이다. 부여에는 낙화암처럼 잘 알려진 곳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알아야 할’ ‘새로이 의미를 부여할 만한’ 인물과 유적들이 많다.

우리는 성충, 흥수, 계백과 낙화암, 부소산, 궁남지, 정림사지 5층 석탑 등으로 상징되는 사비 백제 시대의 인물과 문화 유적에 대해 친숙한 편이다. 그러나 ‘백제’만이 부여의 전부는 아니다. 고려·조선 시대 그리고 그 이후에도 부여와 관련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은 때로는 서원에, 때로는 묘소에, 때로는 사찰에, 때로는 유적 없이 역사 속에 이름을 남겼다. 이제 이들을 재조명 해 그분들의 뜻과 정신을 되새길 때가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부여 정신’을 찾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격주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들’을 연재하는 이유이다.


부여 내산 온해리에 있는 충정공 윤집 선생의 묘 21c부여신문

후손 윤현호씨가 윤집 선생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장면 21c부여신문

‘대개 적병이 강을 건너는데 대로에 거리낄 것이 없으니 달려오기를 바람같이 하고, 번신(藩臣·중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감영이나 병영의 관찰사)이 보내는 장계는 적이 모두 빼앗아 가졌으므로 조정이 막연히 몰랐다. 12일 오후에야 비로소 적세가 급한 줄 알았다.’

병자호란이 끝난 지 10여 년 뒤인 인조 말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일기>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산성일기>는 청나라의 침입에서부터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사실적으로 기록한 일기이다. 작자는 미상인데 쓴 어휘 등을 분석해 볼 때 척화파 인사들에게 ‘~공’ 등의 표현을 쓴 것으로 보아 이들과 가까운 인사로 추측되고 있다.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는 1636년 12월 2일 대군을 거느리고 심양을 떠나 일주일 뒤인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넜다. 조정에서 형세가 위급함을 안 것은 3일이나 지난 12월 12일 오후였다. 12월 13일 조정은 강화도 피난을 의논하며 대신들 간에 갑론을박을 벌였다. 12월 14일 임금의 가마가 남대문을 나서 강화도로 가는데 청나라 기마부대가 이미 홍제원에 이르렀다.할 수 없이 인조가 가마를 돌려 돌아오니 상하가 마음이 급하여 허둥지둥하고 곡소리가 하늘에 사무쳤다. 임금은 광희문을 거쳐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12월 15일 임금이 걸어서 강화도로 가다가 여러 번 엎어져 옥체가 불편해 도로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성을 지키는 군사는 모두 합해 1만2천여명에 불과했다. 쌀과 피, 잡곡을 합해 곡식은 겨우 1만6천여 석이 있었다. 군병 1만명의 한 달치 양식은 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불과 40여 년 지나 닥친 병자호란은 실로 조선 조정에 청천벽력이었다. 적의 침입을 알리는 봉화보다 더 빨리 기마병을 내세워 한양으로 돌진한 청나라 군사의 침입에 조정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렇다 할 대응도 못하고 침략사실을 안 이틀 만에 왕은 피난길에 올랐다. 천연의 요새인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혀 궁여지책으로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나 불과 두 달 만에 왕이 땅바닥에 머리를 세 번 찧는 고두례의 예를 갖춰 청 황제에게 항복하는 치욕을 당했다.

최근 인기를 끈 영화 ‘최종병기 활’은 병자호란을 무대로 한 작품이다. ‘최종병기 활’에서는 이때 끌려간 사람이 50만명이 넘는다고 했으나 <산성일기>에는 심양시장에서 팔려간 사람만 66만명이라고 기록했다. 국방을 소홀히 한 지배층의 무사안일과 외교적 무능 때문에 이역에서 한을 품고 죽어간 조상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쯤 되면 독자들은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 이야기는 하지 않고 왜 병자호란 이야기를 하는가 하고 생각할 것 같다. 부여에는 병자호란과 관련 있는 인물의 묘소가 있고 위패를 모신 서원이 있다. 부여 내산 온해리에 있는 충정(忠貞)공 윤집의 묘와 구룡면 금사리에 있는 창렬사가 그 곳이다. 병자호란 당시 ‘삼학사’의 한 명으로 널리 알려진 윤집 선생(1606년-1637년)의 본관은 남원이다. 고산현감 형갑의 아들이다. 자는 성백(成伯), 호는 임계(林溪). 아버지가 13세 되던 해 별세하자 형으로부터 행실을 익히며 학문에 힘썼다. 22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26세에는 문과에 급제했다.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가 화의로 위기를 극복하자는 최명길 등의 목을 벨 것을 주장했다.

윤집 선생이 척화론을 강하게 주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스스로 애걸하면 적은 더욱 경멸하여 화의조차 제대로 이루지 못하게 된다. 오직 한 마음으로 싸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후에야 강화를 의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최명길 등의 뜻에 따라 화의가 성립되자 후배 오달제와 더불어 상소를 올려 자진하여 척화론자로 나서며 청나라로 끌려갔다. 기록에는 윤집 선생이 청나라로 끌려가기 직전 인조 임금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진실로 나라에 이로움이 된다면 설령, 만 번 죽는다 해도 아깝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어찌 이와 같이 구구절절이 애통해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이에 인조는 “죄가 없으면서도 죽음의 땅으로 떠나는 그대를 보니 내 가슴은 찢어지는 듯 가히 할 말이 없도다. 그대들이 부모 처자가 있는가. 오늘날에 국가의 존망을 진실로 알 수 없으나 만일 국운이 이어진다면 내가 마땅히 어루만져 구휼할지니 염려치 말라”라며 내관에게 술을 가져오라 하여 따라준 뒤 서럽게 울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1671년(현종 12년) 우암 송시열은 <삼학사전(三學士傳)>을 지었다. 병자호란 당시 척화를 주장했던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3인의 전기였다. 이때부터 세상에서는 이들 3인을 삼학사라고 불렀다. <삼학사전>에서는 윤집 선생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공은 총명이 뛰어나서 한 번 눈에 스친 것은 모두 기억하였다. 젊어서 집에 있을 때부터 반드시 효우(孝友)를 우선으로 삼았는데, 어버이가 질병에 있을 때는 항상 근심스런 낯빛으로 지냈다. 3년상을 치르면서는 성례(成禮)를 갖춰 극진하였다. 형제 3인이 한 방에 거처하면서 학업에 힘쓰고 생업을 일삼지 않았으며, 헤진 옷에 거친 밥을 먹고 살면서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세 차례나 대각(臺閣·조선시대 사헌부 사간원의 총칭)에 들어가 언책(言責)을 스스로 담임하였고, 지성으로 옳은 일은 순종하고 나쁜 일은 바로 잡았다. 그는 수양한 바가 매우 바르고 지키는 바가 매우 확고하여 끝내 대절(大節·대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절개)을 성취하였으니 불세출의 군자라 이를 만하다.’

윤집 선생이 청나라로 끌려가 심양 서문밖 형장터에서 청나라 군사들에 의해 살해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1637년 1월 28일에 인조를 떠나 청나라 군사에게 끌려간 뒤 1637년 4월 15일에 심양에 도착해 4일 뒤인 4월 19일 죽음을 맞았다.

청나라 장수 용골타는 심양에서 윤집 선생을 때로는 협박하면서 때로는 가족을 데리고 와서 살라고 회유하면서 굴복시키려 하였으나 윤집 선생은 끝까지 굽히지 않고 조선 지식인의 굳은 절의와 기개를 보여주었다. 온해리 윤집 선생 묘소 앞에 있는 신도비에는 ‘선생이 사망하니 선생의 의대를 동행한 복인(僕人·하인)에게 주고 너희들은 가거라 하여 그 종이 선생의 의대로써 혼을 불렀다’라고 씌어 있다.

인조는 윤집 선생의 집을 구휼하여 매월 월급을 주도록 명령하였다. 효종께서는 특별히 부제학을 추증하였고, 청나라 연호를 쓰지 말며, 그 자손을 채용토록 명하셨다. 윤집 선생의 부인 안동 김씨는 척화파로 널리 알려진 청음 김상헌의 조카딸이다. 윤집 선생이 청나라로 잡혀 갔다는 소식을 듣고 낮이나 밤이나 울부짖더니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자 까무라쳤다. 깨어나 피를 토하기 여러 되요, 기필코 죽고자 하였는데 조부가 위로한 데 힘입어 목숨을 이어갔다. 1665년 7월 돌아가니 임금이 장례에 쓸 것과 선생의 의관을 후히 내려 김포의 선생 장처에 합장하였다. 윤집 선생은 서거한 지 35년이 지난 1671년에야 비로소 묘를 썼다. 시신이 없이 의관만으로 묘를 쓴 것이다. 윤집 선생은 이선, 이징, 이정 등 세 아들을 두었다. 후에 윤집의 손녀가 홍익한의 아들 홍우석에게 시집을 감으로써 윤집과 홍익한은 죽어서 사돈을 맺었다.

온해리 마을 입구에 있는 안내판. 단순하게 지명을 알리는 ‘내산’이라는 표현보다는 ‘충정공’이나 ‘삼학사’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21c부여신문

처음 윤집 선생의 의관을 묻었던 김포 신곡에서 부여 내산 온해리로 묘를 옮긴 것은 숙종 37년(1711년)이다. 왜 묘를 부여로 이장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임금의 명을 받은 지관이 명당 자리를 찾아 이 일대를 지나가다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이곳에 묘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윤집 선생의 아들과 손자의 묘가 함께 있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후대에 부여와 어떤 연고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내산 온해리 입구에는 ‘내산 윤집 묘’라고 쓰인 안내판이 있다. 행정편의적인 발상이 엿보이는 안내판이다. ‘충정공 윤집 묘’나 ‘삼학사 윤집 묘’라고 쓰는 것이 더 그 분의 뜻을 기리는 일일 것이다. 묘소 주변에는 흔한 안내판 하나 없다. 신도비가 있으나 온통 한문으로 되어 있어 읽기에도 어렵다. 최소한 찾아오는 이들에게 윤집 선생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한글 안내판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말무덤 21c부여신문
1. 말무덤
윤집 선생의 묘소에는 ‘말무덤’이 있다. 윤집 선생이 죽자 타고 다니던 말이 윤집 선생의 의관을 갖고 돌아왔기 때문에 말의 충성심을 기리고자 무덤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말무덤은 흥미를 자아낸다.
말무덤은 진짜 말을 묻은 것처럼 길게 무덤 형식을 취했다. 윤집 선생의 스토리와 말무덤 스토리를 잘 엮으면 재미있는 스토리텔링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렬사 21c부여신문
창렬사 21c부여신문
2.창렬사
구룡면 금사리에 있는 창렬사는 삼학사를 모신 서원이다. 1717년 숙종이 온양에 행차했을 때 유생 이덕함 등이 사우 건립 필요성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숙종이 충청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윤집 선생의 의관이 묻혀 있는 부여에 사우를 건립하라고 명령했다. 경종 1년(1721)에 창렬사라는 사액을 받았다.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충절인을 모신 곳이라 하여 보존되었다.


이 프로그램(기획 기사)은 충청남도 지역언론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취재)한 것입니다.

. 21c부여신문

필자 소종섭

외산 출신
부여고·고려대 졸업
시사저널 편집장
재경부여군민회 상임부회장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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