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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기획] 『우리가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 기행』①
[탐사기획] 『우리가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 기행』①
  • 소종섭
  • 승인 2011.11.14 20: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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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사의 충신들’<下>
부여는 역사와 문화, 정신의 고장이다. ‘
패망한 나라 백제’의 쓸쓸함에 대하여 말하는 이들이 있으나 백제의 마지막은 비장했다. 멸망 이후의 항전 또한 치열했다. 반면 신라는 어떠했나.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나라를 스스로 고려에 바쳤다. 고려는 이성계의 쿠데타로 뒤집어졌다. 조선은 매국노들의 협력 속에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낙화암은 ‘패배’와 ‘비참함’의 상징이 아니다. 승자들의 역사 속에 그렇게 기록되었을 뿐이다. 낙화암은 차라리 목숨을 던질지언정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자존심’과 ‘항전’의 상징이다. 부여에는 낙화암처럼 잘 알려진 곳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알아야 할’ ‘새로이 의미를 부여할 만한’ 인물과 유적들이 많다.

우리는 성충, 흥수, 계백과 낙화암, 부소산, 궁남지, 정림사지 5층 석탑 등으로 상징되는 사비 백제시대의 인물과 문화 유적에 대해 친숙한 편이다. 그러나 ‘백제’만이 부여의 전부는 아니다. 고려·조선시대 그리고 그 이후에도 부여와 관련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은 때로는 서원에, 때로는 묘소에, 때로는 사찰에, 때로는 유적 없이 역사 속에 이름을 남겼다. 이제 이들을 재조명하여 그분들의 뜻과 정신을 되새길 때가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부여 정신’을 찾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호부터 격주로 ‘우리가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 기행’을 연재하는 이유이다.

‘의열사의 충신들’<下>

1575년 백제시대의 충신 성충·흥수·계백과 고려시대의 충신 이존오의 위패를 봉안하고 세워진 부여 의열사는 이후 정택뢰·황일호 두 충신의 위패를 추가 배향했다. 정택뢰(1585년~1619년)는 하동 정씨로 정인지(1396년~1478년)의 6세손이다. 호는 화강(花岡)이다. 이조·공조·병조판서·좌의정을 거쳐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학자 가운데 한 명인 정인지는 부여와 인연이 깊다. 아버지 정흥인이 석성현감을 지냈다. 정인지 본인도 1458년 부여에 내려와 한동안 살았다.

하동 정씨들이 부여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 이다. 정택뢰의 부친은 정득열이다. 경남 사천의 현감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진주성 싸움에 참전해 목사 김시민과 힘을 합쳐 왜적과 맞서 싸우다 28세에 순절했다. 정택뢰는 1612년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했다.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인 1615년(광해군 7년) 간신 이이첨 등이 인목대비 폐모론을 제기하자 부당하다고 이에 맞선 이원익이 유배를 당했다. 정택뢰는 이원익을 변호하고 이이첨 일파에게 죄를 물을 것을 강력히 주장하다가 경남 남해의 한 섬으로 유배당해 그곳에서 35세를 일기로 죽었다.

의열사비는 유형문화재 제6호이다. 21c부여신문

<의열사지>는 “정택뢰가 귀양을 가니 어머니 강씨가 다른 아들이 없어 그를 생각하다가 귀양 간 곳에 따라갔다. 기후가 맞지 않아 풍토병에 걸리니 정택뢰가 손가락을 찢어 피를 흘려 약에 타서 드렸다. 1년 남짓 지나 강씨가 세상을 떠나니 이후 애통한 마음에 정택뢰가 미음마저도 입에 넣지 아니하여 눈이 멀고 사지가 마비되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내 정씨가 부여 본집으로 모시고 돌아와 부여현 동쪽 능산 언덕에 장사지냈다”라고 기록했다. 정택뢰는 1806년 순조 6년에 이조판서로 증직(贈職)됐다. 능산리에 묘소가 있고 부여읍 관북리 부소산성의 옛 정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에 정득열·정택뢰·정택뢰의 처 동래정씨·아들 정천세 등 4인을 기리는 정려(旌閭)가 있다.

수북정가에 있는 황일호 시비. 21c부여신문

황일호(1588년~1641년)는 1635년(인조 13년)에 병과에 급제했다. 본관은 창원, 호는 지소(芝所)이다. 큰아버지 황신에게 입양돼 사계 김장생과 조수륜에게 사사했다. 1624년 운봉현감으로 있을 때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사헌부 장령으로 있을 때인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인조 임금을 호종해 남한산성에 들어가 독전어사로 전공을 세웠다. 우암 송시열은 신도비명에서 “공은 밤낮으로 방어에 주력하며 병사들과 인고를 같이 했다. 적들이 갑자기 성을 압박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자 공이 칼을 빼들고 포수를 꾸짖으며 불을 나무에 붙여 던지니 적들이 많이 타죽었다. 크게 함성을 울리고 진격하여 적장 한 명의 목을 베니 적이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라고 기록했다.

그는 청나라와의 화의에 적극 반대하는 주전파였다. 삼전도 화친에 대해서도 끝까지 반대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통정대부에 올라 진주목사에 제수되기도 했다. 그러나 1638년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명을 도와 청나라를 치고자 최효일 등과 모의한 사실이 발각돼 청나라 병사에게 피살됐다.1641년 그가 남별관 밖에 처형 당할 때 북향하여 임금께 절하고 남향하여 모부인에게 하직하니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우암 송시열은 신도비명에 “공께서 돌아가심에 친척들이 그 부모를 잃은 것 같이하고 혹은 삼년을 복상한 이도 있었으며 의주인들은 거리에까지 곡소리가 들리었고 종신토록 상복을 입은 이도 있었다”라고 썼다.

1770년(영조 46년)에 부여의 유림들이 그의 충절을 추모해 의열사에 배향했다. 저서로는<芝所集>이 있고 부여읍 가증리에 그의 묘소가 있다. 규암 수북정가에 그가 1625년 지은 <백마강가> 시비가 있다. 강화 충렬사, 운봉 용암서원, 의주 백마산성사에도 배향됐다.


소종섭 21c부여신문
필자 소종섭
부여고·고려대 졸업, 시사저널 편집장
재경부여군민회 상임부회장,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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