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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백제 시대의 정수(精髓)
사비백제 시대의 정수(精髓)
  • 한봉규 국립부여박물관 학예연구실장
  • 승인 2011.11.15 00: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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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 부여 정림사 절터(夫餘 定林寺址) : 사적 제301호(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1세기 부여신문에서는 창간 7주년을 맞이해 1400여년 전 찬란했던 사비백제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우리고장 문화재를 찾아 국립부여박물관과 공동으로 기획하여 소개하기로 했다.
-편집자 주-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사비천도 이후 왕성(王城) 안팎에 왕흥사, 천왕사 등 많은 절을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시기는 백제미술의 황금기이며, 찬란한 불교문화의 꽃을 피웠다.부여의 진산 부소산에서 궁남지로 뻗은 도성 중심가 대로변에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사찰인 ‘정림사 절터’가 자리 잡고 있다.

정림사터 전경 21c부여신문
사찰의 이름과 창건연대 등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1942년 일제 강점기 때 석탑 주변의 발굴조사에서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라고 새겨진 고려시대 명문기와 조각이 출토되어 그 이후로 ‘정림사(定林寺)’라는 절의 이름이 밝혀졌다.

명문기와 21c부여신문
가람배치는 사비백제 시기의 전형적인 사찰구조인 중문, 탑, 금당, 강당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된 1탑 1금당식의 가람구조이다. 또한 발굴조사에서 중문 앞에 사각형의 연못이 있었음이 확인됐다. 정림사 절터에서 발굴된 유물은 납석제삼존불, 소조불두, 도용(陶俑), 기와류, 토기류 등과 고려시대의 유물이 출토됐다.

도용(陶俑) 21c부여신문
정림사지오층석탑은 불교문화가 융성했던 부여에 남아 있는 백제시대의 유일한 탑으로 처음에는 사람들이 1층 탑신(塔身)에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 백제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세운 기념탑으로 생각하고 ‘평제탑(平濟塔)’이라 불렀다. 그러나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석탑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 탑은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과 익산 미륵사지석탑 2기 뿐이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멸망하면서 사비(부여)에 있는 왕궁을 비롯해 모든 건물과 사찰 등은 불에 타 없어졌으나 정림사지오층석탑은 무사하게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정림사는 언제 폐찰됐는지는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백제시대의 석탑인 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의 석불인 정림사지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어, 절은 백제시대에 창건돼 고려시대(고려 현종 19년/1028년)까지 계속 이어져 운영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도용(陶俑) : 흙으로 빚어 구운 인물상, 동물상을 말한다. 도용의 기능은 껴묻거리용(副葬用)의 명기(皿器)에서 비롯되었으며, 순장풍습(殉葬風習)의 대용물로 제작 사용되었다.


한 봉 규 국립부여박물관 학예연구실장 21c부여신문
국립부여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국립청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국립춘천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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