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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마을’ 생각해 볼만하다
‘김시습 마을’ 생각해 볼만하다
  • 소종섭 시사저널 편집장
  • 승인 2012.10.11 10: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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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브랜드 확대 발전시켜 역사고증 통한 ‘테마 마을’ 발굴 기대
ㄴ 21c부여신문
지난 8월 27일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회장 소종섭)는 강원도 영월 일대를 답사했다. 홀수 달 셋째 주 토요일에 진행하는 梅月紀行 여덟 번째였다.

답사에 참여한 31명의 회원들은 단종 유배지인 청령포, 단종릉인 장릉, 단종이 머물렀던 관풍헌 등을 거쳐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응부, 이개, 유성원 등 사육신 여섯 명과 김시습, 남효온, 박심문, 엄홍도 등 충신 네 명의 위패를 모신 창절사에 들렀다. 어디나 그렇듯 위패를 모신 사당에는 인적이 드물다.

창절사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회원들은 촛불을 켜고 향을 사른 뒤 머리를 숙였다. 역사 속 충절의 위인들이 얼핏 나타났다 사라졌다.

회원들을 대표해 인사했다. “5백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우리는 만났습니다. 조선 최고의 지식인이자 문학가이고 사상가, 여행가, 기록가였던 매월당 김시습. 선생은 시공을 넘어 하늘의 별처럼 살아 지금도 우리에게 크나큰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선생의 삶과 뜻을 기리며 잠시 추념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영월 창절서원 입구. 21c부여신문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회원들이 영월 창절서원에서 김시습을 추모하고 있다. 21c부여신문


전국의 웬만한 곳에는 김시습의 흔적이 남아 있다. 시비가 있거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사당이 있거나, 그도 아니면 전설이 있다. 그 만큼 김시습은 전국을 다니지 않은 곳이 없고 곳곳의 풍광과 세상사를 글로 남겼다. 역사 인물 가운데 김시습만큼 브랜드 가치가 높은 인물도 드물다.

무량사 극락전. 21c부여신문

부여 무량사는 매월당 김시습 선생이 돌아가신 곳이다. 부도(승탑)와 자화상, 사리로 상징되는 ‘김시습의 흔적’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바로 이 때문에 김시습 정신의 현재화가 가능한 토양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빈곤하기 짝이 없다. 무량사에는 자화상 모사품이 모셔져 있는 영정각이 있을 뿐이다. 무량사 극락전에서 김시습의 부도로 가는 숲길은 철조망으로 막혀 있다.

무량사 입구에 있는 시비는 풀과 돌무더기에 가려져 존재가 희미하다. 이제 김시습과 관련해서 좀 더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곧 부여 발전과도 연계된다.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는 그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

평안한 모습의 무량사 전경. 21c부여신문

강원도 춘천 신동면에 가면 ‘김유정 마을’이 있다. 고향인 이곳을 무대로 작품 <봄봄> <동백꽃> 등을 쓴 소설가 김유정을 테마로 한 문학마을이다. 이곳이 무량사 일대에 가칭 ‘김시습 마을’을 조성하기 위한 한 모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김유정 마을’에는 기념관이 있고 그가 살던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 그가 쓴 다양한 작품들을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추모제, 문학제, 문학캠프 등이 이곳에서 열린다. 한 마디로 ‘김유정 메카’라고 할 수 있다. 마을 이름도 ‘김유정 마을’이고 이곳에 정차하는 기차역 이름도 ‘김유정역’이다.

춘천시는 면 이름도 아예 ‘김유정면’으로 바꾸려고 하고 있다. 2010년 1만여 명에 불과했던 김유정역 이용고객은 지난해 10만명 가까이로 늘었다. 수도권과 가깝고 복선 전철이 개통된 영향이 있다는 것을 감안해도 놀라운 변화이다. 난개발 등 이에 따른 부작용도 발생하고 있지만 충분히 연구해 볼만한 사례이다.

무량사와 무량 마을을 중심으로 한 ‘김시습 마을’은 이미 스토리텔링을 할 만한 바탕이 마련되어 있다. 김시습이 세상을 떠난 장소, 부도, 자화상이 있다. 그의 시신이 묻혔다는 무량사 인근 장소와 그의 시신을 화장한 곳이 어디인지도 어느 정도 추론이 가능하다.

이런 곳들을 하나로 묶고 그가 쓴 시와 작품들을 마을 곳곳에 전시하면 훌륭한 테마 마을을 만들 수 있다. 함께 노력하면 기념관도 만들 수 있다. 더불어 문학상 제정, 김시습 학술회의 개최, 동상 제막 등도 추진할 만한 테마들이다.

이런 종합적인 접근이 이루어진다면 외산면 또한 행정구역 명칭을 ‘김시습면’으로 바꾸는 문제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나 싶다. ‘김시습’은 부여가 갖고 있는, 발전 가능성이 큰 무형의 중요한 자산 가운데 하나이다.


최치원은 무량사 뒤편에 묻혔다?

ㄴ 21c부여신문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무량사와 관련해 주목되는 인물이 최치원이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유학 가 빈공과에 합격해 이름을 크게 날린 신라 말 대문장가이다. ‘토 황소격문’이 들어 있는 <계원필경집>이 전하며 후세인들이 엮은 <사산비명> <고운선생 문집>이 있다.

아무 관계도 없을 것 같은 최치원과 무량사는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을까.

<삼국사기>에는 최치원의 최후와 관련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최후에는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살았는데, 동복 형인 현준 및 정현 스님과 도우(道友)를 맺어 휴식하고 한가히 지내면서 여생을 마쳤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다른 기록이 등장한다. 실학자로 널리 알려진 풍석 서유구와 오주 이규경이 ‘최치원 묘가 홍산에 있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서유구는 <교인계원필경집서>에서 “(최치원이) 진성왕 때 가족을 이끌고 강양군(합천) 가야산에 들어가 생애를 마쳤다. 호서의 홍산에 장사 지냈다.

어떤 사람들은 공이 우화등선(羽化登仙) 했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이다”라고 썼다. 그는 <삼한금석록>을 인용해 “최치원 묘비의 제액은 최치원의 자필이며 음기는 고려 초기의 명필 최홍효가 쓴 것이다. 글씨는 종요(鍾繇)의 서체로 고졸하다”라고 썼다. 실제로 묘비를 본 것처럼 썼다.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최치원은) 가족과 함께 강양군 가야산에 들어가 일생을 마쳤다. 묘는 호서의 홍산 극락사 뒤에 있다”라고 기록했다. ‘극락사’는 무량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단, 그는 이 무덤이 진짜 무덤이 아니고 후학들이 만든 가짜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두 사람은 최치원의 <계원필경집>을 간행하는 일에 동참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최치원의 묘가 실제로 무량사 뒤편에 있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전설인지는 확실치 않다. 연구가 더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 오고 역사 기록에 남아 있다는 것은 무량사와 최치원이 무언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무량사에서 산 하나를 넘으면 나타나는 보령 성주사지에 있는 국보 8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최치원이 쓴 글이다. 인근 서산과 홍성에도 최치원과 관련한 유적지들이 있다.

이런 전설 때문일까. 1970년대에는 최치원의 후손들이 최치원의 비석이나 묘를 찾는 사람에게 거액의 사례금을 주겠다고 해 필자가 태어난 무량마을 주민들이 한동안 이를 찾느라 법석을 떤 적도 있다. 물론 찾지는 못했다.

매월당 김시습이 말년에 무량사에 온 것을 최치원과 연결 지어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다. 유-불-도 3교가 회통한다는 ‘삼교회통론’의 선구자가 최치원이고 김시습은 그 맥을 이은 인물이다.

시대를 잘못 만나 뜻을 펴지 못하고 은둔하는 삶을 살았다는 측면에서 삶의 행적 또한 비슷하다. 김시습은 전국을 돌며 최치원의 행적을 찾아 시를 남겼다. 그가 최치원을 정신적으로 흠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김시습이 말년에 무량사로 온 것을 자신의 사상적 스승인 최치원을 찾아 온 것으로 해석한다면 과장된 것일까.



ㄴ 21c부여신문
필자 소종섭
부여고, 고려대 졸업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회장
재경부여군민회 상임부회장
부여고 총동창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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