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조형물 장식으로 치장되고 차량통행이 되지 않는 ‘백제대교’가 생기기 전이니, 1968년 이전의 이야기이다. 선친께서 큰댁에서 요리한 복어 국을 드셨다. 같이 드신 다른 분들은 아무런 증상이 없는데 당신만 탈이 나셨던 것이다. 아마도 복어 독이 제대로 제거되지 않은 상태에서 요리가 된 것을 모르고 드신 것이리라.
이곳 저곳으로 치료를 다니셔도 완전히 낫지 않으니 외산면에 있는 아미산 무슨 암자로 요양차 어머니와 함께 가신지 몇 달이 되었었다. 그 때 아미산 암자로 선친을 뵈러 가는 중에 처음으로 버스를 탄 채 버스가 배에 실려서 자온대 옆 규암 나루를 건널 때, 신기해했던 몇 장면의 흐릿한 기억이 어렴풋하게 검은 그을음 날리면서 깜빡이는 남폿불에 비친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떠올랐다 사라진다.
규암나루(窺巖津) 바로 옆이 자온대(自溫臺) 바위이고 그 바위 위쪽 봉우리에 수북정(水北亭)이라는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일명 ‘엿바위’라고도하는 규암(窺巖)은 백제 멸망당시, 당나라 장군 소정방의 군대가 이 바위 옆에 숨어서 사비성을 엿 봤다는 전설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 나루가 부여와 서해안 공업 도시인 비인에 연결되는 교통 중심지에 있어서, 배를 이용하여 차량을 운반하여 연결해 주니, 시간도 많이 걸리고 이동도 불편하여 다리를 놓았으면 하는 것이 이 근동 사람들의 오랜 숙원이었다.


이런 와중에 1968년도 말에 5억원의 공사비를 들여 812미터의 금강에서 제일 긴 다리가 완공되니, 부여관광안내책자에도 한동안 소개가 되는 유명한 관광명소로 각광 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 백제대교가 완공되고 40여년이 지나자 바로 옆에 새로운 다리가 건설되었고, 안전성이 확보되지 않은 이 다리는 장식용과 인도교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니 세월의 무상함을 엿볼 수 있다.
삼국유사 기2 제2 남부여 편에 보면, “사자(백마강)절벽에 역시 바위 하나가 있어 10여명이 앉을 만하니, 백제왕이 왕흥사로 행차하여 예불하기 전에, 이 바위에서 멀리 불상을 보고 절을 하면(望拜), 그 돌이 절로 따뜻해졌다.(自煖) 그로 인하여 돌석(㷝石 구들돌)이라 했다.” 라는 구절이 있다.
이를 후대에 ‘자온대(自溫臺)’라 칭하고, 이후 수북정 김흥국 선생과 교류가 있던 사계 김장생 선생의 제자이고, 1654(효종 5년)에 부여현감을 지낸 송시묵(宋時默·1605~1672)의 동생인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1607~1689) 선생이 큰 글씨로 ‘자온대(自溫臺)’라는 글씨를 썼다.
이것을 수북정 아래 자온대 암반에 음각으로 새겨 붉은 물감으로 칠했다. 또한, 봄에 수북정 앞 백마강을 배경으로 자온대와 강 건너 모래밭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대단히 아름다워 ‘수북정 청람(水北亭 晴嵐)’이라 하며 부여팔경의 한 경치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수북정을 논할 때는 김흥국(金興國·1557~1623) 선생을 생각하게 된다. 선생이 어려서 처음 효경을 배울 때, 자부사군(資父事君) 이란 구절에서 ‘효도란 것은 충성하는 근본이다’라고 하고 이를 지켜나갔다 한다. 선조 22년(158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正字)·정언(正言)·북평사(北評事)를 지냈다.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올곧은 성격에 직간을 많이 하여, 영변·회양·한산·양주(楊州) 등의 외직 수령을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양주목사 재임 시 조카뻘 친척이고, 훗날 영의정을 역임하는 김류(金瑬) 등으로부터 인조반정에 직접 참여할 것을 요청받았다.
그러나 당신은 이미 광해군의 녹을 먹었으니 의리 때문에라도 가담할 수 없다 하며 거절했다. 곧이어 사직하고 낙향하여 부여 백마강 위에 띠집을 짓고 아호인 ‘수북정’이라 현판한 다음, 후진을 양성했다 한다. 1623년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유현(遺賢)으로 천거되어 부제학(副提學)을 제수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고 같은 해에 67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
경기도 양주군 행곡 좌오향에 장사 지냈는데 묘표에는 인조 때 받은 ‘부제학’이라 하지 않고 유언에 따라 광해군 때의 마지막 벼슬인 ‘양주목사’라 표기했다. 학문에 힘썼으며 시문을 좋아하여 당시의 거장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1548∼1631)·상촌 신흠(象村 申欽·1566~1628)·추포 황신(秋浦 黃愼·1560~1617) 등과 친교가 있었다.
한편, 사계 김장생(1548∼1631)은 율곡 이이 선생의 적통(嫡統)을 이어받아 조선 예학을 정비한 한국 예학의 종장(宗匠)으로 임진왜란과 호란 이후 조선의 국가정신과 사회발전의 방향을 정립한 주인공이며, 우암 송시열의 스승이다. 사계 전서 3권에 보면, 사계선생이 백마강가에 있는 ‘양주 김흥국’의 집에 들러 여러 사람들과 모여 담소했던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또한, 상촌 신흠은 월상계택(月象谿澤,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1564~1635), 상촌 신흠(申欽·1566~1628), 계곡 장유(鷄谷 張維·1587~1638), 택당 이식(澤堂 李植·1584~1647))으로 불리는 조선 선조 때에 문장에 뛰어났던 사대문장가(四大文章家) 중의 한 분으로, 인조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수북정 팔경’이라는 제하의 시, 여러 수가 전해지고 있다.
김흥국 선생은 양주목사를 그만두고 낙향하여 백마강가에 초옥을 짓고 살면서 문인들과 교유도하고, 후학도 가르치시다가 생을 마치신 것으로 되어 있다. 그가 돌아가신 후 20여년이 지나 이 초옥이 허술해지자 후손들이 수북정 건물을 1644년(인조22)에 1차 중건하고, 165년이 지나 1809년(순조9)에 2차로 다시 중건하고, 다시 160년이 지나자 당시 전준기 부여군수가 1969년 7월에 3차 중건을 하게 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고, 1984년 충남 문화재 자료 100호로 지정되었다.
2012년인 올해로부터 368년 전에 1차 중수를 해 보완한 이 ‘수북정’ 건물은 순천(順天) 김씨 문중에서 계속하여 관리해 오던 것을 2005년 순천김씨 종중회의에서 의결하여 다음 해에 부여군에 기증의사를 전달하였다 한다.
이로써 ‘수북정’의 체계적인 보존관리가 이루어 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고, 이 순천 김씨 문중의 ‘수북정’ 기증 사례는 문화재는 후손인 자손들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것이라는 문화재의 공공기능을 되새겨 보게 한 멋진 선례를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수북정(水北亭) 정면에 붙어 있는 예서체의 기품 있고 뭇사람의 시선을 끄는 현판 글씨는 명필로 이름 날렸던 기원 유한지(綺園 兪漢芝·1760~1834)가 쓴 글씨이다. 그는 19세기 삼절(시 서 화)로 유명했던 자하 신위(申緯·1769~1845)가 《경수당집(警修堂集)》에서 ‘영춘현감 유한지의 전서·예서가 당대 제일이다’라고 평 하였고,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금석학자·고증학자인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완당집(阮堂集)》에서 ‘조윤형(曺允亨)과 유한지는 예서에 조예가 깊었으나 문자에 기(氣)가 적다’고 평을 받은 시대가 인정한 명필이다.
현재의 이 건물은 규암면 규암리 산147-2번지 정상에 앞면 3칸·측면 2칸으로 직사각형의 형태이며, 지붕은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에 12평(38.76m2)의 면적으로 지어져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활주가 네 귀퉁이에 설치되어 있으며, 가운데 부분은 1평 넓이의 우물천정으로 연화 문양으로 단청되어 있다. 이는 사방에 문을 달아 기거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였던 흔적으로 수북정 김흥국 선생이 ‘백마강가에 띠집을 짓고 살았다’고 하는 것을 방증하는 자료가 될 수 있다.
또한, 규암 근동이 모두 수북정 선생의 하사받은 땅이었으므로 이 공간의 조경을 충분히 관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주변을 살펴보면, 어른의 두 아름이 넘는 참나무가 5~6그루가 떡하니 버티고 앉아 수북정의 운치를 한층 더해 주고 있다. 봄에는 파릇한 생명력을, 여름에는 녹음을, 가을에는 풍성한 열매와 단풍을 그리고 겨울에는 살을 에는 강바람을 견디며 강직한 지조를 지킨 김흥국 선생을 생각게 하는 기능으로써 묵묵히 수북정과 함께 살아 온 역사의 산 증거인 것이다.


식물학자인 김태정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참나무가 그 정도 크기로 자라려면 적어도 200~300년은 족히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다. 따라서 수북정 일원은 400여 년 전에 김흥국 선생의 심미안에 따라 조성되고 지속적으로 관리된 자연 정원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한편, 문화와 역사로 만나는 우리 나무의 세계 2권(박상진 저)에 보면 재미있는 상수리 얘기가 있어 옮겨본다.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 우리의 정사(正史) 기록을 보면 참나무의 열매인 도토리는 배고픔을 달래주는 구황식물(救荒植物)로서 임금이 직접 시식을 할 정도로 귀중하게 여겼다. 흉년이 들수록 도토리가 더 많이 달리는 나무의 특성이 바로 생명줄이기 때문이다. 참나무 종류의 꽃가루받이가 이루어지는 시기는 봄, 가뭄이 오기 쉬운 5월경이다. 햇빛이 쨍쨍한 맑은 날이 계속되면 꽃가루가 쉬이 날아 수정이 잘되고 가을에 많은 열매가 열리는 도토리는 ‘도토리 풍년’이 온다. 반대로 5월경에 비가 자주 오면 농사는 풍년이 들어도 이 녀석들의 꽃가루는 암꽃을 영 찾아갈 수가 없어서 도토리는 흉년일 수밖에 없다. 자연의 조화는 이렇게 신비롭다.”
이 거대한 상수리나무들로 인하여 사람들은 매년 가을이 되면, 다람쥐들이 열매를 물어가기 전에, 아침 일찍 상수리나무 밑에 와서 밤사이 익어서 떨어져 있는 상수리를 줍곤 했다. 그리고 더 많은 상수리 열매를 따기 위해 사람의 가슴 높이 부분의 상수리나무 줄기를 계속해서 큼지막한 돌로 치고 더 이상 열매가 안 떨어질 때까지 또 쳤다. 그리고 다음 날은 또 다른 사람이 상수리를 따기 위해 같은 부위를 또 치기를 수 십 년간 반복해 왔다.
이로 인해 상수리나무는 상채기가 커다랗게 나고 그 부분이 썩었으나 세월이 흘러 아물고, 이제는 사람들이 열매에 욕심을 내지 않아 돌로 치지 않으니 잊혀진 기억처럼 훼손된 상처를 영광의 훈장으로 생각하고, 꿋꿋하게 상처냈던 사람들보다도 오래 살아남아 과거에 풍요로운 상수리를 굶주린 사람들에게 한없이 나누어 주었던 무용담을 조용히 들려주는 듯하다.

윤준웅 부여문화원장이 펴낸 ‘사진으로 본 부여의 백년’ 책(1998년)에 보면, 1926년에 ‘규암 수양단 청년들’이 수북정을 배경으로 단체로 찍은 사진을 볼 수 있다. 현재의 정자 모습이 아니라 모두 벽으로 둘러 쳐져 있는 별장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아마도 그 이후에 벽채를 다 털어내고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기본적으로 우리 선조들은 집이나 정자를 지을 때, 요즘처럼 불도저로 모두 까뭉개고 돌부터 하나하나 다시 쌓는 방식이 아니라 자연 있는 그대로의 터에 건물이 이를 거스르지 않도록 사뿐히 들어앉히는 형태를 취한다. 그래서 자연과 잘 조화된 건물에 조용히 앉아 창틀이나 문을 통해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는 ‘차경(借景)’의 철학을 반영하곤 했다. 즉 자연 그림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잠시 빌리는 것이다. 그리고 고정된 그림이 아닌 변하는 그림을 즐겼던 것이다.
이 틀을 빌려서 조용히 수북정에 올라 정자 기둥들을 액자 틀로 삼아 주변 경치를 찬찬히 살펴보자. 정자에 앉아 자리를 옮겨 가면서 조용히 감상을 하게 되면 눈을 옮기는 시점에 따라, 하루 중 아침 점심 저녁에 따라, 년 중 계절의 변화에 따라, 날씨와 내 마음의 상태에 따라, 함께하는 사람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화무쌍하게 변하면서 살아 있는 다양한 경치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감상 할 수 있게 된다.
지금은 변방으로 몰려 방문하는 이들도 더욱 뜸해진 ‘수북정’과 ‘자온대’ 일원, 초단위로 바뀌는 IT세상에서, 부여 땅에 있는 우리나라 역사 최초 ‘인공 조경’의 원조라는 ‘궁남지’와 지척의 거리에서 400여 년 전에 백이와 숙제(伯夷 叔齊)를 흠모하고 광해군과의 의리를 지키려는 김흥국 선생이 당신의 심미안으로 ‘자연 조경’ 방식으로 터를 잡아 은거 한 곳 수북정.
시간을 내어 가끔씩 이 ‘수북정’에 들러 울창한 참나무와 시시각각 변하는 경치를 감사하면서 조용히 자신과의 대화를 나누어 보는 것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휴식 겸 지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살갑게 다가오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 참고자료 ▶수북정집, 유문사 - 1981년 ▶부여관광안내도, 매일관광문화사 - 1976년 ▶신역 삼국유사, 일연 저, 최 호 역, 홍신문화사 - 1994년 ▶사진으로 본 부여의 백년, 윤준웅 - 1998년 ▶사계전서, 김장생 저, 박완식 김능하 역, 민족문화추진회 - 2006년 ▶문화와 역사로 만나는 우리 나무의 세계 2 , 박상진, 김영사 - 20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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