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4 21:55 (수)
[탐사기획]이몽학 열 번째
[탐사기획]이몽학 열 번째
  • 21c부여신문
  • 승인 2011.12.29 11: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 기행」 열 번째
부여는 역사와 문화, 정신의 고장이다. ‘패망한 나라 백제’의 쓸쓸함에 대하여 말하는 이들이 있으나 백제의 마지막은 비장했다. 멸망 이후의 항전 또한 치열했다. 반면 신라는 어떠했나.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나라를 스스로 고려에 바쳤다. 고려는 이성계의 쿠데타로 뒤집어졌다. 조선은 매국노들의 협력 속에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낙화암은 ‘패배’와 ‘비참함’의 상징이 아니다. 승자들의 역사 속에 그렇게 기록되었을 뿐이다. 낙화암은 차라리 목숨을 던질지언정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자존심’과 ‘항전’의 상징이다. 부여에는 낙화암처럼 잘 알려진 곳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알아야 할’ ‘새로이 의미를 부여할 만한’ 인물과 유적들이 많다.

우리는 성충, 흥수, 계백과 낙화암, 부소산, 궁남지, 정림사지 5층 석탑 등으로 상징되는 사비 백제 시대의 인물과 문화 유적에 대해 친숙한 편이다. 그러나 ‘백제’만이 부여의 전부는 아니다. 고려·조선시대 그리고 그 이후에도 부여와 관련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은 때로는 서원에, 때로는 묘소에, 때로는 사찰에, 때로는 유적 없이 역사 속에 이름을 남겼다. 이제 이들을 재조명 해 그분들의 뜻과 정신을 되새길 때가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부여 정신’을 찾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격주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들’을 연재하는 이유이다.


이준익 감독이 연출한 영화 은 이몽학을 소재로 다룬 영화이다. 21c부여신문
이준익 감독이 연출하고 황정민 차승원 한지혜 등이 출연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라는 영화가 있다. ‘왕은 백성을 버렸고 백성은 왕을 버렸다. 누가 역적인가!’라는 도발적인 물음을 던지는 이 영화의 대체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1592년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 임진왜란의 기운이 조선의 숨통을 조여 오고 민초들의 삶은 피폐해져만 가던 선조 25년. 정여립, 황정학(황정민 분), 이몽학(차승원 분)은 평등 세상을 꿈꾸며 ‘대동계’를 만들어 관군을 대신해 왜구와 싸우지만 조정은 이들을 역모로 몰아 대동계를 해체시킨다. 대동계의 새로운 수장이 된 이몽학은 썩어빠진 세상을 뒤엎고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야망을 키우고 친구는 물론 오랜 연인인 백지(한지혜 분)마저 미련 없이 버린 채, 세도가 한신균 일가의 몰살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반란의 칼을 뽑아 든다. 한때 동지였던 이몽학에 의해 친구를 잃은 전설의 맹인 검객 황정학은 그를 쫓기로 결심하고, 이몽학의 칼을 맞고 겨우 목숨을 건진 한신균의 서자 견자(백성현 분)와 함께 그를 추격한다. 15만 왜구는 순식간에 한양까지 쳐들어오고, 왕조차 나라를 버리고 궁을 떠나려는 절체절명의 순간. 이몽학의 칼끝은 궁을 향하고, 황정학 일행 역시 이몽학을 쫓아 궁으로 향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이몽학은 부여와 관련이 깊은 역사 인물이다. 역사책에게는 부여를 중심으로 일어난 이 난을 ‘이몽학의 난’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 속에 ‘반란군의 수괴’로 기록된 그를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에 넣은 이유는 역사의 공과를 떠나 그 또한 부여 인물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기록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나라에 공을 세워 뚜렷한 업적을 남긴 역사 인물이 있는 반면 이몽학처럼 반란을 꾀하다가 사라졌지만 당시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새로운 세상을 열어보겠다는 야심찬, 그러나 이루지 못한 꿈을 가졌던 역사 인물도 있다. 이처럼 부여에는 밤과 낮이, 음과 양이 공존하는 다양한 모습의 인물들이 있다.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로 배척하기보다는 이들 역사적인 인물 모두를 부여 인물사의 한 조각조각으로서 인식해 총체적으로 녹여 받아들이는 퓨전식 사고를 해야 할 것이다.

<선조실록>과 <쇄미록>(조선 중기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의 피난 사실을 기록한 민간인 오희문의 피난일기), 조선 후기 문신 김시양의 수필집인 <자해필담>, 조선 후기 이긍익이 지은 야사 총서인 <연려실기술> 등에 나와 있는 이몽학의 난 전말은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1592~1598)이 아직 끝나지 않은 선조 29년(1596) 7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당시 홍산현을 중심으로 이몽학은 거사했다. 이몽학은 홍산 무량사에서 모의를 하고 조련을 실시했으며 ‘동갑회’라는 일종의 계조직을 이용하여 친목회를 가장해 반군을 규합했다. 김경창, 이구, 장후재, 승 능운을 비롯하여 노비 팽종 등을 거느리고 선봉장이 되어 홍산 쌍방축에서 주둔하며 군사를 모았는데 거의 6~7백 명이나 되었다. 본격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기 전부터 이미 세력을 형성한 것이다.
이몽학군은 일거에 홍산현을 점거하고 임천군을 공격해 점령했다. 21c부여신문

이몽학군은 직접 중앙권력을 탈취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1596년 7월 6일 이몽학은 밤을 틈타 홍산현 동헌을 공격하여 현감 윤영현을 사로잡고 임천군으로 쳐들어가 임천군수 박진국을 납치한다. 광범위한 계층이 참여한 이몽학군은 이들로부터 관인을 탈취해 군사를 모았는데 순식간에 그 수가 수천에 이르렀다.

이몽학은 ‘읍내나 촌에 사는 백성들은 편안히 있고 동요하지 말라. 이번 거사는 남아 있는 백성을 구제하려는 것이다’라고 명분을 내걸었다. 노비나 평민은 물론 좌수, 별감, 교생 등 향촌의 지배층이 반란군에 대거 가담했다. 이들 중에는 임진왜란에 의병으로 참여했던 이들도 많이 섞여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조경남이 지은 <난중잡록>에는 당시 상황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백성들은 난리와 관리들의 온갖 수탈로 곤궁해졌다가 한 번 풍문을 듣고 따르는 자가 수일이 못되어 군사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반군이 지나는 곳에 밭을 매던 자는 호미를 가지고, 행상을 하던 자는 막대기를 들고 분주히 즐겨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하룻만에 홍산과 임천 일대를 장악한 이몽학군은 다음 날인 7일에는 정산현을 함락시켰고 8일에는 청양현을 차지했으며 9일에는 대흥(현 예산) 또한 점령했다. 이때에 이르러 군사 수는 수만에 달했다. 부여현감 허수겸은 반군이 영내에 침범하기도 전에 스스로 겁을 내어 하인들이 반군에게 무기를 수송하는 것을 보고도 감히 처단하지 못하였다.

서산군수 이충길은 동생들을 반군에 보내 왕래케 하면서 서로 도왔을 정도로 이몽학군의 기세는 등등했다. 반군은 10일에는 홍주성으로 진격하였다. 당시 홍주목사였던 홍가신(홍가신은 부여 현감으로 있을 때인 1575년 계백 성충 흥수 이존오 정택뢰 황일호 등이 모셔져 있는 의열사를 건립한 인물로 부여와 인연이 깊다)은 민병을 모으고 마을의 무장들을 불러 모아 성을 지킬 계책을 논의하며 꾀를 부려 반군의 홍주성 진격을 늦추었다.

이몽학군은 홍주성 앞에 당도해 1천여 명씩 진을 5진으로 편성해 홍주성을 공격했다. 밤이 되자 홍가신은 군사들에게 성 밖으로 불화살을 쏘라고 명령해 반군의 거점으로 활용될만한 민가들을 불태워 버렸다. 동시에 충청병사 이시언, 어사 이시발, 중군 이간 등이 이몽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홍주로 향하는 등 관군의 기세가 거세졌다.

홍주성 함락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들자 이몽학군은 7월 11일 새벽을 이용해 군사를 이끌고 덕산 쪽으로 도망했다. 이때 도원수 권율 장군은 호남 군사를 이끌고 석성현에 진출해 반군의 정세를 정찰했다. 부하를 보내 이몽학군에게 권율 장군과 의병장 김덕령 등이 각기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 왔으므로 날이 밝으면 모두 죽일 것이라고 위협했다. 한편으로는 이몽학의 목을 가져오는 자는 용서하겠다고 회유했다.
이몽학은 무량사 뒤편에서 깃발을 만들고 군사를 조련했다. 21c부여신문

이에 이몽학군의 김경창, 임억명, 태근 등 세 사람이 군막으로 난입해 잠자리에 있던 이몽학의 목을 베어 관군에 바치니 이몽학군은 일거에 무너졌다. 이몽학을 직접 죽인 임억명은 노비였다. <연려실기술>에 나와 있는 ‘무기를 가진 자는 군관·무사 등 수백 명 뿐이고 그 밖에는 모두 시골 백성인데 맨손이었다’라는 것이 이몽학군의 허술한 무장 상태를 보여준다.

들불처럼 타올랐던 이몽학의 난은 이렇게 불과 10여일 만에 허망하게 막을 내렸다. 이몽학군의 또 다른 수령이었던 한현 또한 체포되어 7월 17일 선조의 국문을 받은 뒤 참살되었다. 한현은 의병장 출신으로 전투 경험이 있고 군사 전략을 아는 이였다. <선조실록>에는 한현이 이렇게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곧장 서울로 가는 것이 상책이요, 성곽 없는 고을을 공격하는 것이 중책이요, 홍주를 진격하는 것이 하책이라고 했는데 한현이 초상을 당해 홍주로 간 이후로 몽학은 곧장 홍주를 공격했다’

7월 22일 서울에 압송된 이몽학의 머리와 수족이 효수되었다. 홍산현에 있던 이몽학의 집은 허물어졌고 홍산현도 혁파되었다. 이몽학의 난과 관련해 능지처참된 사람만 33명에 달했고 처형된 사람은 100여 명에 이르렀다.

반면 포상도 잇따랐다. 이몽학을 참수한 임억명, 김경창은 가선에 승진되었고 태근은 6품 실직이 되었다. 홍가신은 청난공신 1등에, 박명현은 청난공신 2등에 결정되어 승계와 은전이 내려졌다. 은전을 받은 이는 임해군 이하 수천 명에 달했다. 이처럼 포상자가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조정에서 이몽학의 난을 심각하게 보았다는 반증이다.

이몽학의 난과 관련해서는 당시 유명한 의병장들이 모두 이 난에 가담했다는 말이 나왔다. 충용 장군 김덕룡, 영천군수 홍계남, 조방장 곽재우, 고언백 등이 그들이다. 하나 같이 당시 의병장으로서 백성들의 신망을 받던 이들이다. 이 때문에 서울로 붙잡혀 와 곤욕을 치렀으나 왕이 “죄를 묻지 않겠다”하여 풀려났다.

그러나 단 한 사람 김덕령만은 예외였다. 옥에 갇혀 추국을 받던 김덕령은 20여 일만에 장살 당했다. 김덕령은 끝까지 난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부인했고 조정 역시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당시 많은 이들이 추앙하며 따르던 김덕령을 이몽학의 난과 엮어 죽인 데는 정치적인 이유가 있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오랜 전쟁과 피난으로 리더십이 취약했던 조정이 의병이라는 든든한 세력 기반을 갖고 있던 김덕령이 이를 바탕으로 혹 반란이라도 꾀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또 다른 의병장에게 강한 경고를 보내는 의미에서 김덕령을 본보기 삼아 죽였다는 해석이다.

역사적인 사건 막후에는 이처럼 유탄을 맞아 운명이 바뀐 많은 사람들이 있다. 김덕령 또한 그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몽학의 난 피해자는 김덕령만이 아니다. 홍산현 부근에 살던 이들도 ‘친 이몽학편’ ‘반 이몽학편’으로 나뉘어졌다. 얼마 전까지도 그 때의 앙금이 남아 있어 후손들이 서로 왕래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이몽학이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다. 선조실록에는 이몽학의 출신 지역이나 가계가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자해필담>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몽학이라는 자는 서울의 서얼인데, 방자하고 건방져서 그 애비에게 쫓겨나 호남·호서를 방황하다가 한현의 선봉장이 되고 그의 군에 예속되어 한현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연려실기술에도 비슷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몽학이 태어난 곳이 서울인지, 부여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그가 부여 홍산현을 중심으로 반란군을 모으고 군사를 조련해 난을 일으킨 것으로 볼 때 부여와 남다른 인연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또 단기간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호응해 일어났다는 것은 그가 비록 역사 속에서 난의 괴수가 되어 죽었지만 당시 백성들로부터는 신망을 얻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와 관련된 많은 설화가 지금도 홍산을 중심으로 한 부여 일대에 전해오는 것이 그 반증이다. 현실의 제도 속에서 그는 죽었지만 백성들의 마음 속에는 영웅담으로 살아남아 5백년 세월을 이어온 것이다.

이몽학의 난이 이처럼 짧은 기간 폭발적인 호응을 얻으며 번졌던 데는 이유가 있다. 이몽학의 난은 부여 청양 대흥 등 충청우도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충주 제천 영동 등 충청좌도 지역에 비해 이곳은 상대적으로 임진왜란 때 왜군으로부터 피해를 덜 당한 곳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때문에 전쟁 지역에서 거두지 못한 각종 조세부담에 시달렸다. 체찰사 정철과 부사 김찬 등이 올린 장계문에 ‘전라·충청 지역 행세가 위태롭기가 한 오리의 머리털 같다’라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또 이 지역이 장시가 발달되어 지배층의 수탈이 심했고 그에 따라 도적 발생이 빈번했으며 백성들의 의식 또한 앞선 곳이라는 점도 한몫했다.

지금도 홍산 일원에는 이몽학과 관련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 내려온다. 이것은 그가 세월을 넘어 여전히 전설적인 영웅으로서 백성들의 마음에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 가지만 살펴보았다.

부여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이몽학과 관련한 전설들
① 홍수 물 건너기 전설
‘나뭇잎을 타고 다녔다. 가랑잎새 하나를 띄워 놓고서 요술을 부려 배를 만들어 갔다. 나막신을 신고 다니는데 그것을 물을 건너다녔다’ 이몽학이 보통 사람과 다른 기적을 행하는 인물이라는, 영웅이지만 시대를 잘못 만나 불행한 인물이라는 동정심과 경외감이 배어 있는 전설이다.

② 오뉘 힘내기 전설
‘이몽학 남매가 결의를 맺어 누이는 성을 쌓고 이몽학은 서울을 갔다 오기로 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누이는 성을 다 쌓고 정문에 돌만 하나 얹으면 되었다. 그런데 이몽학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이몽학 누이에게 팥죽을 끓여 놓고 ‘추운데 이것 먹고 쌓아라’ 했는데 그 사이에 이몽학이 도착했다. 딸을 희생시키고 이몽학을 이기게 한 것이다.‘ 이 전설은 백성들이 이몽학이 자기가 부족한 점을 훌륭한 사람으로 보충하였다면 난이 실패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몽학을 영웅시하면서도 그의 한계를 인식하는 백성들의 마음이 숨어 있는 전설이다.

이 프로그램(기획 기사)은 충청남도 지역언론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취재)한 것입니다.

필자 / 소종섭 외산 출신 부여고·고려대 졸업 시사저널 편집장 재경부여군민회 상임부회장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회장 21c부여신문

필자 / 소종섭
1966년 외산 출신
부여고·고려대 졸업 시사저널 편집장
재경부여군민회 상임부회장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