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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꿈꾸다 죽은 늙은이 - 김시습을 찾아서⑧
[기획연재] 꿈꾸다 죽은 늙은이 - 김시습을 찾아서⑧
  • 소종섭
  • 승인 2014.08.20 09: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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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을 둘러보고 짓다
1493년 매월당 김시습은 부여 무량사에서 59세로 생을 마쳤다. 조선 최고의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인 그의 면모는 사상가, 철학가, 종교인, 문학가, 여행가 등 실로 다양하다. 유교에 바탕을 두었으면서도 불문에 귀의에 <십현담요해> <화엄석제> 등 불교와 관련해 많은 수준 높은 저술을 남겼다. 도교에도 정통한 그는 ‘한국 도교의 鼻祖’로 불린다. 전국을 유람하면서 남긴 시가 남아 있는 것만 2,200수가 넘는다.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와 ‘애민의’‘인군의’ 등 많은 수필도 남겼다. 홍유손은 선생을 기리며 쓴 제문에서 ‘기암괴석과 이름난 물은 공께서 감상하신 뒤에야 비로소 빛나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전국 팔도에 선생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김시습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놀고먹는 이들을 경멸하며 노동의 신성함을 예찬했다. 자리만 누리는 권력자들을 조롱하며 “어떻게 저런 인물이 자리를 맡았나” 하고 한탄했다. 역사 속에서 지조와 광기의 천재로 상징화 된 그는 자유인이며 비판자, 동시에 왕도정치가 구현되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꿨던 이상가였다. 선생은 스스로를 ‘夢死老’ 즉, ‘꿈꾸다 죽은 늙은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착안해 <꿈꾸다 죽은 늙은이- 김시습을 찾아서>라는 기획연재의 제목을 따왔다. 과거 속에서 현재를 돌아보는 인문기행이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부탁드린다.

만복사저포기 무대인 남원 만복사와 불교 처음 접한 송광사 찾기도…
“민속이 억세어서 싸움을 하면 굴복시킬 수가 없으며 보복하려고 꾀하곤 하니 이것이 백제의 유풍이다”


광한루 - 김시습은 광한루원에서 피리 소리를 들으며 시를 남겼다. 21c부여신문

1460년(세조 6년) 10월, 김시습은 관동을 떠나 호서 지역으로 향했다. 호남을 향한 길이었다. 먼저 청주의 경씨 성을 가진 생원 집에 묵었다. 그런 뒤 개태사, 은진 객사, 삼례역, 앵곡역, 금산사, 귀신사를 거쳐 내장산으로 갔다. 김시습은 은진현 객사에서 노사신을 만났다. 1455년 호조판서로서 최항과 함께 <경국대전> 편찬을 총괄했고 1481년 <동국통감>을 엮은 그 노사신이다. 세조 조정에서 익대공신 3등에 오르는 등 크게 성공한 그는 성종 시대인 1495년 영의정에 오른다. 그와 김시습은 뜻이 맞지 않았다. 은진현 객사에서 노사신은 김시습에게 이렇게 물었다.

즐률 지팡이 짚고 표연히 산 위로 올라가서
한사코 인간 세상에 머물려 하지 않는구려.
암자에는 부들방석이 있을 것이거늘
어찌하여 짚신 발로 천하를 돌아다니오?

인간 세상을 떠나 불문에 귀의했으면 불도에 전념할 것이지 왜 천하를 돌아다니며 고생하느냐는 얘기였다. 물음의 형식을 띠었지만 내용은 비웃는 것에 가까웠다. 이에 대해 김시습은 이렇게 답했다.

뜬세상 풍파가 이 같이도 드넓다니!
푸른 솔과 흰 돌은 인간 세상에서 멀고 말고.
옛날 놀던 자취는 봄날의 꿈과 같아
세상을 벗어나지 못했던 잘못에 부끄럼 느낀다오.

광한루 21c부여신문

김시습은 내장산 영은사, 용굴을 돌아보고 정읍으로 갔다. 전주 만경대, 천왕사터, 화암사를 둘러보았다. 이어 변산으로 가 내소사가 있는 능가산에 올랐다. 청림사, 용계사도 찾았다. 변산의 불사의암에서 진표 율사의 상에 참배했다. 당시에는 불사의암에 진표 율사의 참회행을 그린 그림이 있었다고 한다. 김시습은 부안성에서 군졸들이 평안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 안도했다. 고부성에 들어서는 호수에 오리가 떠도는 것을 바라보며 회상에 잠기기도 했다.

김시습은 관서 지방을 유람할 때부터 역사를 시로 노래했다. 그러나 은유적으로 표현했던 것과 달리 호남 여행에서는 역사를 시로 노래하면서 직간접으로 비판하는 생각을 담았다. 과거와 달라진 모습이었다. 김시습은 이때 ‘백제의 옛일을 읊다’라는 다섯 수의 시를 지었다. 그 중 둘째 수를 소개한다.

견훤이 완산에 성을 두었을 때
의기가 얼마나 호방했던지
붉은 옷 그 노인은 어디 사람이었나.
신이 내려 엉겼노라 행적을 가탁하여
옛것 뒤엎고 혁신하여
부절 쥐고 백성들을 다스렸지.
북으로 한강 가에 접하고
동으로 두류산 언덕에 이르러
억세어 남이 무시하지 못하자
부강을 자만해서 조심하지 않았나니,
사로국 땅을 침범하여
용과 범이 미워하듯 하다가
올빼미처럼 자식에게 잡혀 먹어
고기 썩듯 문드러져 망하고 말았지.

광한루원 오작교 21c부여신문

김시습은 1461년 겨울을 전라도 진원현 진산의 인월정사에서 묵었다. 자신이 머물던 초막에 인월이라는 편액을 써주고, 그렇게 이름 지은 자초지종과 불교적 이치를 시로 적어주었다. 인월정사에 머물면서 김시습은 소나무를 심었다. 김시습의 호남 여행은 1462년까지 계속되는데 나주에 도착한 그는 목사의 주연에 초대되어 갔다. 잔치가 끝난 뒤에는 홀로 역루에 기대어 한숨을 쉬었다. 절로 시가 나왔다. ‘해 저문 호남 땅’이라는 시다.

꽃 가득 나주성에 봄놀이 열렸건만
피리 소리 노랫소리 나그네 시름 일으키네.
관아 길 작은 매화는 비 맞아 봉오리 터지고
역 앞의 실버들은 바람 닿아 부끄럽네.
짙은 구름 덮인 바다에서 뿔피리 소리 들리는 밤
창 너머 옥 같은 달 대하여 홀로 누각에 기대었다.
해 저문 호남 땅 곱절이나 서글퍼라.
오색구름 서북쪽이 나 살던 서울인가.

광한루원에 있는 춘향 영정 21c부여신문

김시습은 호남의 보살사를 들른 뒤 광주 무등산에 올랐다. 가는 곳마다 그는 시를 썼다. 호남만이 아니라 전국 8도 산천을 시로 읊었다. 그것은 문학적 재능의 발현이자 뜻을 펴지 못한 시대에서 그가 세상을 향해 외치는 절규였다. 무등산에 오른 뒤 그는 ‘무등산에 올라’를 썼다.

우거진 산 푸른 빛 아지랑이에 잠기니
높고 낮게 돌이 쌓인 샛길은 능수버들로 어둑하구나
신사와 불당에는 교목도 많고
하늘의 별들은 손에 닿을 듯 가까워라.

만복사터 - 에 나오는 ‘만복사저포기’의 무대인 남원 만복사는 한때 3천 여명의 승려들이 생활했던 큰 사찰이었다. 21c부여신문

그리고 다시 화순을 거쳐 조계산 송광사를 찾았다. 송광사는 보조국사 지눌이 선풍을 일으킨 곳으로 조계종 삼보사찰 중 승보사찰이다. 김시습은 진락대, 호대, 조계루, 십이영당 등을 둘러보았다. 송광사는 김시습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사찰이다. 18세 때 김시습이 모친상을 치른 뒤 막막한 가슴을 달래기 위해 불법을 접하고 머물렀던 곳이 송광사이다.

당시 그에게 불법을 가르친 이는 준상인, 즉 설준 대사였다. 이런 인연 때문인지 김시습은 호남 기행길에 들른 송광사에서 준상인에게 무려 20수나 되는 시를 헌정하였다. 안평대군 문하에서 글을 배운 설준 대사는 1473년(성종 4년)에 고양의 경릉 동쪽에 있던 정인사 주지를 역임한 고승이었다.

송광사를 떠난 김시습은 전북 남원으로 갔다. 광한루원이 있는 곳이다. 그는 피리 소리를 들으며 글을 남겼다. ‘광한루에 오르니 피리 소리 들리다’이다.

수레와 말이 뜸하여 객관은 쓸쓸한데
작은 다락은 휘황한 석양빛에 짓눌려있네
길게 울리는 한 가락 피리는 구슬 같은 사람이 불겠구나
혹여 달님 선녀가 지어낸 우의곡은 아닐는지

만복사지 석인상 21c부여신문

김시습이 남원에 들렀을 때 아마 만복사도 보았을 것이다. 만복사는 김시습이 지은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에 나오는 ‘만복사저포기’[상자 기사 참조]의 무대이다. ‘만복사로 승려가 돌아오는 모습’은 예로부터 남원 8경의 하나로 꼽혔다. 탁발을 나갔던 승려들이 줄지어 만복사로 돌아오는 모습이 실로 장관이었던 것이다.

한때 3천 명 가까운 승려들이 이 절에 머물렀다고 하니 과거에 얼마나 규모가 컸던 사찰인지 짐작케 한다. 1597년(선조 30년) 왜적이 남원 서문을 통과하여 이 절에 불을 지르면서 대웅전, 약사전, 명부전, 천불전, 나한전 등 거의 모든 전각이 불에 탔다. 현재 만복사터에는 보물 제30호 만복사지 오층석탑과 보물 제31호인 만복사지석과, 보물 제32호인 만복사지 당간지주, 보물 제43호인 만복사지 석불입상 등이 남아 있어 그 옛날 웅장했던 만복사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남원을 떠난 김시습은 팔량치를 넘고 운봉현으로 들어가 지리산을 보았다. 지리산을 넘으면 바로 경상도 함양이다. 이어 거창 견암사를 거쳐 합천 해인사로 향했다. 그런 뒤 한동안 문학사의 위대한 업적인 <금오신화>를 저술한 경주 남산으로 갔다.

만복사지 석조입상 21c부여신문

김시습은 금오산에 머물면서 호남 지방을 유람하면서 지은 시들을 모아 <유호남록>을 엮었다. 1463년 가을 일이다. 그는 ‘탕유호남록후지’에 이렇게 적었다.

내가 관동을 다 유람한 뒤 다시 호남에 이르러 늙은 매화와 성근 대나무, 겨울 치자와 아름다운 난초를 보았다. 귤·유자와 가을에 익은 벼, 비자와 동백과 동청(사철나무)도 역시 멋진 볼거리였다. 감, 밤, 생강, 면화, 바다의 여러 진품들도 많았는데, 백제는 바로 이런 것들에 의지하여 부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천석(泉石)의 승경은 전혀 없었다. 호수로 말하면 벽골·율호가 있으나 이미 말라버렸고, 괴어 있는 것은 더러운 물풀 서너 떼기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거주하는 백성들이 실하고 물산이 풍부한 것은 관동의 네댓 곱절이나 되니, 그렇기에 백제가 그것을 믿고 강성하여 교만하게 굴다가 망한 것이다. 지금도 민속이 억세어서 싸움을 하면 굴복시킬 수가 없으며 보복하려고 꾀하곤 하니 이것이 백제의 유품이다. 그러나 성상의 교화가 흡족하고 어진 은택이 흘러, 이 동해 바다 구석구석에 사는 창생들이 번성하지 않음이 없게 되었다. 잘 살게 되자 비로소 사람들이 착해져서 저마다 학문으로 나아가 억세고 뻗대는 습속을 바꾸어 효성스럽고 우애로우며 염치를 알게 되었고, 대대로 훌륭한 인재가 나와 왕실을 보필하였다. 이에 국경에는 근심이 없고 난리를 알리는 봉화도 멎었다. 이것은 성스런 왕조의 상서라 하겠다.

만복사지 석조대좌 21c부여신문


‘만복사저포기’는 무슨 내용인가?
<만복사저포기>는 왜구의 난을 피해 정절을 지키다 죽은 명문거족의 딸과, 재주는 있으나 외롭기만 한 양생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사랑을 나눈 이야기이다. 살아 있는 남자와 죽은 여인의 사랑, 부처와 윷놀이를 한다는 발상의 파격 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조선 땅을 배경으로, 조선 사람을 등장시켰다는 조선적인 이야기 즉 자주 의식도 엿보인다.

성리학을 근본으로 삼던 시대적 영향으로 선조 때 간행된 <매월당집>에는 만복사저포기는 물론 <금오신화> 전체가 실리지 않았다. 유학자들이‘해괴한 이야기’로 치부해 버렸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김시습의 자주 의식과 자유로운 상상력이 발휘된 작품이라고 평가된다. 주인공이 끝까지 의리를 지킨 것은 ‘절의의 인물’로 상징되는 김시습 자신의 모습과 닮았다. <만복사저포기>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전북 남원에 사는 총각 양생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만복사 구석방에 외로이 살았다. 짝이 없음을 슬퍼하던 중 부처와 저포놀이(윷놀이)를 해 이긴 대가로 아리따운 처녀를 얻었다. 그 처녀는 왜구의 난 중에 부모와 이별하고 정절을 지키며 3년 간 궁벽한 곳에 묻혀 있다가 배필을 구하던 중이었다. 둘을 부부 관계를 맺고 며칠 간 열렬한 사랑을 나눈 뒤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양생은 처녀와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서 기다리다가 딸의 상을 치르러 가는 양반집 행차를 만났다. 양생은 비로소 자신이 사랑을 나눈 상대가 3년 전에 죽은 딸의 혼령이었음을 알았다. 여인은 양생과 더불어 부모가 베푼 음식을 먹고 나서 사라졌다. 어느 날 밤 양생은 공중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자신은 타국에 가서 남자로 태어났으니 당신도 불도를 닦아 윤회를 벗어나라고 했다. 양생은 여인을 그리워하며 장가를 들지 않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약초를 캐며 살았다.

[참고] <김시습 평전> 심경호
<김시습과 떠나는 조선시대 국토기행> 김재웅
<매월당 김시습> 이문구
<매월당 김시습> 이종호
<길 위의 노래> 정길수 편역
<금오신화> 김경미 옮김

ㄴ 21c부여신문

소 종 섭
외산 출생, 부여고-고려대 졸업
전) 시사저널 편집국장
현)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회장
현) 인포마스터 사회적전략센터장
저서 <백제의 혼 부여의 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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