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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기획] 유금필
[탐사기획] 유금필
  • 소종섭
  • 승인 2012.03.15 09: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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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 기행[14]
부여는 역사와 문화, 정신의 고장이다. ‘패망한 나라 백제’의 쓸쓸함에 대하여 말하는 이들이 있으나 백제의 마지막은 비장했다. 멸망 이후의 항전 또한 치열했다. 반면 신라는 어떠했나.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나라를 스스로 고려에 바쳤다. 고려는 이성계의 쿠데타로 뒤집어졌다. 조선은 매국노들의 협력 속에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낙화암은 ‘패배’와 ‘비참함’의 상징이 아니다. 승자들의 역사 속에 그렇게 기록되었을 뿐이다. 낙화암은 차라리 목숨을 던질지언정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자존심’과 ‘항전’의 상징이다. 부여에는 낙화암처럼 잘 알려진 곳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알아야 할’ ‘새로이 의미를 부여할 만한’ 인물과 유적들이 많다.

우리는 성충, 흥수, 계백과 낙화암, 부소산, 궁남지, 정림사지 5층 석탑 등으로 상징되는 사비 백제 시대의 인물과 문화 유적에 대해 친숙한 편이다. 그러나 ‘백제’만이 부여의 전부는 아니다. 고려·조선 시대 그리고 그 이후에도 부여와 관련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은 때로는 서원에, 때로는 묘소에, 때로는 사찰에, 때로는 유적 없이 역사 속에 이름을 남겼다. 이제 이들을 재조명 해 그분들의 뜻과 정신을 되새길 때가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부여 정신’을 찾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격주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부여의 역사 인물들’을 연재하는 이유이다.

성흥산성 안에는 주민들에게 선정을 베푼 고려 개국공신 유금필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21c부여신문

백제 최후의 결전장, 임천면 군사리와 장암면 지토리의 접경 지역에 있는 성흥산성이다. 백제 시대 이름은 가림성(加林城). 백제시대부터 가림군(加林郡)이었던 임천은 조선 태종 13년부터 임천군으로 불렸다. 웅진백제 시대인 동성왕 23년(501년) 8월에 웅진성과 사비 일대를 지키기 위하여 금강 하류 요새지였던 성흥산에 성을 쌓았다.

머리띠를 두르듯 봉우리를 중심으로 바깥 부분에 성을 쌓아 ‘테뫼식 산성’으로 불린다. 삼국사기에 관련 기록이 남아 있기에 옛 지명과 축성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중요한 산성이다. 지그재그식으로 성벽을 쌓았고, 전체 길이는 8백미터에 이른다. 높이는 3~4미터 정도. 금강을 따라 평야가 주변에 펼쳐져 있기 때문에 강경을 비롯한 금강 하류 일대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군사적인 요충지이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는 명산 24곳 중 한 곳이었을만큼 종교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지역으로 인식되었었다.

성흥산성은 백제 제24대 왕인 동성왕의 죽음과 관련이 깊다. 삼국사기에는 이 성을 지키던 장군 백가(苩加)가 반란을 일으켜 동성왕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랫동안 동성왕의 신임을 받던)위사좌평 백가로 하여금 501년 8월 성을 축조하게 한 뒤 지키게 하였는데 (중앙 정치에 멀어질 것을 걱정한) 백가는 병이라 핑계하고 나아가 지키고자 하지 않으므로 왕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그 해 11월 동성왕은 사비원(부여)에서 사냥을 하다가 큰 눈을 만나 (웅진으로 돌아가는) 길이 막히게 되었다. 이때 백가가 왕을 시해하고자 도모하였다. 백가에게 화를 입은 왕은 12월에 죽었다. 뒤를 이어 무령왕이 즉위하자 백가가 가림성에 웅거하여 모반하므로 무령왕이 병마를 거느리고 나아가 한솔·해명에게 명하여 토벌하니 백가가 나와 항복했다. 무령왕은 백가를 참수하여 머리를 백강에 던졌다.’

이 성흥산성 안에 고려의 개국공신 유금필을 모신 유태사지묘(瘐太師之廟)가 있다. 묘(廟)는 무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이나 훌륭한 신인(神人)들의 신주(神主)·위판(位版)·영정(影幀)·소상(塑像) 등을 모신 사당을 일컫는다.

고려 태조 왕건이 극진히 아꼈던 명장이었던 유금필 장군은 925년에 정서대장군, 933년에 정남대장군, 935년에는 도통대장군이 되어 왕건이 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후삼국 통일전쟁에 참가해 수많은 무공을 세워 태조 묘정에 배향된 역사적인 위인이다. 딸이 고려 태조의 제9비 동양원부인이 되었을 정도로 개인적인 관계도 남달랐다.

유금필 장군이 태어난 곳(그는 황해도 평산 사람이다)도 아니고, 죽은 곳도 아닌 부여에 왜 그를 기리는 사우가 있는 것일까. 1929년에 간행된 ‘부여지’의 ‘성흥산성실기’에는 이렇게 실려 있다.

‘백제가 망하자 왕자 풍이 이 성에 들어와 웅거하였으나 일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 후 고려 태조 때에 유태사 금필이 진남장군으로 전라도 순천군 산성으로부터 바야흐로 송도(개성)을 향하여 가던 중 임천에 오게 되었다. 유금필 장군은 이 성에 올라 주민 가운데 빈궁한 자를 진휼하였다. 그 후 주민들이 은덕을 잊지 못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사하였다.’
유금필 장군 사당 옆에는 무송 유씨 후손들이 세운 비석이 있다. 21c부여신문

성흥산성 사당 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에도 이와 비슷하게 되어 있다.

‘이곳은 고려 개국공신 유금필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유금필 장군은 황해도 평주 사람으로 932년에 마군장군이 되어 골암진에 침입한 북번을 평정하였으며, 그 뒤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후백제 섬멸 뒤 남방을 다스릴 때 고려 태조를 만나러 가다가 임천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 곳 패잔병들의 노략질이 심하고 나쁜 병과 흉년까지 겹쳐 민심이 흉흉하게 되었다. 이때 군량을 나누어주고 둔전을 운영하게 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선정을 베푸니 임천 백성들이 감사하여 산(生) 사당을 세워 장군의 공덕을 기리고 해마다 제사를 올려왔다. 941년 장군이 죽자 고려 태조가 충절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그 뒤 성종이 《태사유공지모》 라는 어필 현판을 내렸다.’

유금필 장군이 부여에 왔다는 기록은 역사적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유금필 장군이 언제, 왜 임천에 왔는지, 와서 무슨 활동을 했는지 등은 분명치 않다. 그러나 다른 곳에는 없는 그를 기리는 사당이 있고, 그와 관련한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으로 볼 때 그가 이곳에 왔던 것은 사실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가 부여에 주둔했던 시점은 대략 934~936년 사이로 추정된다. 이유가 있다. 934년(고려 태조 17년) 태조 왕건은 홍성을 장악했다. ‘홍성 싸움’에서는 견훤이 직접 5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왕건과 싸웠으나 3천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히는 대패를 당하며 후백제의 군세는 급격히 위축된다.

935년 신라 경순왕의 항복에 이어 936년 논산에서 후백제군을 대파한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고 명실상부한 고려왕국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전투의 중요성이나 홍성, 논산 등 전투의 양상을 볼 때 바로 이 시기에 유금필 장군은 충남 서부의 전략적 요충지인 성흥산성 일대에 주둔했을 가능성이 높다.
임천과 장암에 걸쳐 있는 성흥산성은 백제시대 이래 군사적인 요충지였다. 고려 초기 유금필 장군은 이곳에 주둔하며 후백제군을 섬멸하고 주민들을 구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21c부여신문

차를 세우고 가파른 길을 숨을 헐떡이며 올라 산성에 오르니 사방이 탁 트여 강경 들판과 서해로 흘러드는 금강의 물줄기가 한 눈에 들어온다. 높이는 2백61미터 밖에 안 되지만 평지에 돌출해 있어서인지 제법 높다는 느낌이 들었다. 적의 움직임을 그대로 볼 수 있기에 역시 천혜의 요새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몇 년 전에 왔을 때는 정비가 잘 되어 있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정상 평지가 제법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SBS 드라마 ‘서동요’ 촬영지였던 ‘사랑나무’의 기운은 더욱 성성해 보였다. ‘사랑나무’에 손을 대고 가족의 안녕과 부여의 발전을 기원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사랑나무’에서 유태사묘로 가는 길에 있는 우물은 겉모양은 멀쩡했으나 먹을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어쩌면 백제시대 때부터 있었던 우물이라고 생각하니 우물 곁에서 정담을 나누는 백제 군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유금필 장군의 사당은 평지를 약간 지나 올라가는 오르막에 있었다. 담장이 허물어져 공사를 하고 있었다. 울타리를 살짝 넘어 들어가 안을 들여다보니 사당 안도 공사 중이라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1976년 이전까지는 산성 아래에 사는 무당이 이 사당을 관리했다. 그 이후부터는 무송 유씨 종친회가 이곳을 시조묘로 여기고 해마다 음력 3월 18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원래 사당 안에는 유금필 장군의 목상이 모셔져 있었다. ‘호서읍지’(1871년)에는 이와 관련해 ‘성흥산성 안에는 목상이 설치된 사당이 있다. 이 목상은 속전에 고려 명장 유금필이 이 성을 지켰기에 모셨다. 이 같은 내용의 사적은 없으며 전설로 전하는 것 뿐이다.’라고 나와 있다. 고려 시대 이후 이곳 주민들에게 유금필 장군이 일종의 ‘신(神)’으로 추앙 받았다는 징표이다.
유금필 장군을 모신 사당 안에는 다섯 구의 목상이 있었으나 도난 당했다. 21c부여신문

목상은 다섯 기가 있었다. 유금필과 부인, 아들, 딸 두 명이었다. 얼굴만 조각하고 몸은 그대로 두었다. 남자는 푸른색 옷을, 여자는 빨간 색 옷을 입혔고, 높은 단 위에 일렬로 봉안했다. 남자 신상은 검은색으로 된 모자를 쓰고 있다. 여자 목상은 검은 머리에 얼굴에 하얀 분을 바르고 양 볼에 붉은 연지를 찍었다. 그러나 2008년쯤 누군가가 침입해 이 목상들을 훔쳐 갔다고 한다. 사당 옆에는 무송 유씨 종친회에서 세운 ‘이곳이 유금필 장군이 머무른 장군당터이다.’라는 비가 세워져 있다.

취재 과정에서 새로이 확인한 사실이 하나 있다. 유금필 장군을 모시는 사당이 성흥산성 말고 장암면 장하리에도 있었다는 것이다. 장하리에는 태성산(台城山·110m)이 마을의 진산이다. 태성산은 백제시대에 도읍의 1차 방어선이었던 성흥산성에서 부여읍내로 가는 중간 기착지에 해당한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중요도가 크다는 이야기이다. 이 태성산 봉우리에 ‘태사각’이라는 사당이 있었다. 1970년대까지 마을 주민들은 이곳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당제를 지냈다. 해마다 음력 정월 첫 번째 ‘정일(丁日)’을 택하여 지낸 정기적이고 공식적인 행사로 인근 마을 주민들도 참가할 만큼 마을 축제였다는 것이다.
장암면 장하리 태성산 정상에는 유금필 장군을 모셨던 태사각터가 있다. 21c부여신문

장하리 마을 주민인 강상모씨는 “태사각에는 유금필 장군과 부인 두 명 등 목상 세 개가 모셔져 있었다. 높이는 50센티 정도였다. 진주 강씨들이 장정마을에 터를 잡기 시작한 것이 17세기 이후인데 태사각은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안다. 태사각은 1980년대 초반쯤 화재가 나 불에 탔다. 그 이후 내가 임시로 움막 형태의 집을 지어놓았다”라고 증언했다. 강상모씨가 알려준 조그만 산길을 따라 태성산 정상에 올랐다. 건너편을 바라보니 백마강 줄기가 바로 눈앞에 보였다. 군사기지가 있을만한 곳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태사각이 있던 터는 돌을 쌓아 울타리를 만든 곳에 조그만 벽돌 슬레트 움막이 있었다.

충절공 유금필. 그는 ‘백제’라는 관점에서 보면 후백제를 멸망에 이르게 한 주역 가운데 한 명이다. 길환 등 후백제의 장군들도 여럿 죽였다. 그가 새로이 등장한 권력인 ‘고려’의 개국공신이라는 ‘신권력의 핵심’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그를 모신 사당이 성흥산성 외에 장하리에도 있었다는 사실은 그를 추모하는 마음이 부여 일대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유금필 장군이 당시 어떤 형태로 선정을 펼쳤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분명치 않으나 전설대로 가난과 전란에 찌든 임천 일대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구휼 활동을 펼쳤을 가능성이 높다. 유금필 장군의 사당을 돌아보며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떠올랐다.

ff 21c부여신문

필자 / 소종섭
1966년 외산 출신
부여고·고려대 졸업 시사저널 편집장
재경부여군민회 상임부회장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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